“지금으로서는 내년은 물론 내후년 투자도 ‘셧다운’ 수준으로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화학 계열 대기업의 한 투자 담당 임원은 11일 “내년 고금리, 원자재 값 인상 등에 따라 웬만한 신규 투자는 이미 모두 보류로 돌아선 상태”라며 “법인세 인하까지 무산되면 투자심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내년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예고된 상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법인세까지 감당해 가며 투자 확대를 검토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년 우리 경제에 거대 야당발(發) ‘경기 발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예산 편성을 비롯해 경제 운용 방향 설정은 정부의 고유 영역인데 다수 의석을 등에 업은 야당이 집권당 행세를 하면서 경제 운용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부 제안 이후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다. 윤석열 정부는 경기 침체 국면에서 기업에 대한 감세를 통해 투자와 고용을 일으키는 선순환 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야당은 ‘초부자·초대기업’ 감세 프레임을 앞세워 전혀 협의에 응하지 않고 있다.
평소 합리적인 성품으로 잘 알려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조차 9일 예정에 없던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야당에 더 이상 제안할 것도 없고 설명할 방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울분을 토했을 정도다. 야당 측에서 협상의 여지를 완전히 닫아버리니 정부가 더 이상 움직일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여기에 김진표 국회의장이 나서 “일단 법인세 인하를 통과시키되 그 시행을 2년간 유예하자”는 중재안까지 내놨으나 야당은 이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우리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전 세계 최고 법인세율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경제위기 때마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수출은 10월 전년 대비 5.7% 줄어든 데 이어 11월에는 14.0%나 줄어 이미 비상등이 켜졌다. 특히 주력 업종인 반도체 수출은 8월 이후 넉 달 연속 감소했다. 정부 방안대로 법인세 최고세율을 현재 25%에서 22%로 낮추더라도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는 경쟁자인 대만의 TSMC(20%)보다 2%포인트 더 높은 세 부담을 져야 해 이미 경쟁력에서 상당한 격차가 벌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우리나라 경제 구조상 대부분의 투자는 대기업이 맡고 있어 투자 여력을 늘리려면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대기업 기준 1%)도 지금보다 더 높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이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내년 예산 7조 원 삭감에 대해서도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재정을 투자 효과가 큰 곳에 효율적으로 투입해 ‘승수효과’를 높여야 하는데 야당은 청년원가주택(1조 1000억 원) 건설 등 후방효과가 큰 사업에 대한 예산은 줄이고 이 재원으로 선심성 사업인 지역화폐 예산을 되살리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이 사업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조세재정연구원에서 “한 해 손실이 2300억 원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해 이미 낙제점을 받았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야당의 ‘1호 사업’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야당발 경기 발작에 대응해 선제적인 △수출 지원 대책 △기업 규제 완화 드라이브 등의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앞서 용산 대통령실 주도로 ‘수출전략회의’가 신설되는 등 어느 정도 밑그림이 나오기는 했지만 기업인들이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속도감 있게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부처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수출전략회의에서 원전·방산·조선과 같은 수주산업에 대한 세일즈 외교 성과물이 하나씩 소개될 수 있을 것”이라며 “수출 기업에 대해서도 각종 세금 지원 방안 등이 검토돼 조만간 발표되는 ‘2023년 경제정책방향’에 담길 것”이라고 말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도 “내년에는 수출 부진이 경제 운용에 가장 큰 화두가 될텐데 이런 면에서는 정부가 방향을 일단 잘 잡았다”며 “여기에 더해 엔화 약세에 대응한 수출 전략 등을 정교하게 잘 다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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