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 이후 시장 불안이 고조되면서 최근 국내 금융 여건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긴축적 수준이라는 한국은행 평가가 나왔다. 금융 불안이 우리 경제 최대 리스크로 떠오른 것이다. 경기 침체 우려가 점차 커지는 가운데 부동산 경착륙 우려 등으로 금융시장 불안이 확산하는 만큼 한은도 각종 대책 마련과 함께 통화정책 속도 조절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11일 한은에 따르면 통화정책국이 추산하는 금융상황지수(FCI)는 10월 기준 -1.55를 기록했다. 코로나19 사태 초반인 2020년 3월(-1.5)보다 소폭 하락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2.5) 직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최근 금융 여건이 실물경제에 비해 과도하게 긴축적이라는 의미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FCI가 하락한 것은 금리나 환율보다는 최근 주식이나 주택 가격 하락이 이어진 가운데 시장 불안 영향으로 회사채 신용 스프레드가 확대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FCI는 금리·환율·주가 등 6개 금융 변수를 가중 합산한 뒤 표준화해 산출한다. 한은은 FIC를 통해 금융 상황을 판단하고 실물경제를 예측할 뿐 아니라 통화정책 수행의 정보 지표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FCI가 중립 수준(0)을 크게 벗어나 1 또는 -1을 넘어서면 전반적인 금융 상황이 실물경제에 비해 지나치게 완화적(+) 또는 긴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통화정책 당국이 금융 상황 변화를 각별히 예의 주시하면서 필요할 경우 즉각 대응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문제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2를 넘어 과도하게 완화적이었던 금융 여건이 단기간에 긴축적으로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특히 FIC가 과도한 긴축 수준일 때마다 주요 금융 사건이 발생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각각 -6.0, -2.5까지 떨어졌고 대우그룹 사태나 신용카드 사태 때도 -1.0 수준을 기록했다. FCI가 -1.5 수준으로 급락했던 코로나19 당시 한은은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까지 단숨에 0.50%포인트 내리는 이른바 ‘빅컷’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번 위기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낼 수 없다. 코로나19 당시에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가 먼저 정책금리를 0.00~0.25%까지 내리면서 한은도 빅컷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고강도 긴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국내 경제 여건 역시 내년 초까지 5%대 고물가 예상되는 등 정책 환경이 달라졌다. 한은은 물가가 목표 수준인 2%에 수렴한다는 증거가 확인될 때까지 금리 인하를 논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신용 스프레드 확대 등 긴축적 금융 상황이 지속되면서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부담은 빠르게 늘고 있다. 연말 대규모 기업어음(CP) 만기 도래를 앞두고 자금 수급 불확실성은 높아지는데 부동산 경착륙 가능성이 제기되는 만큼 한은도 대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일단 시장 안정화를 위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규모를 늘리고 만기도 14일물에서 1개월물로 확대해 이번 연말부터 무사히 넘기겠다는 심산이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금융시장이 위축된 것은 우리 경제에 금리 민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며 “기준금리도 긴축적인 영역에 진입한 만큼 정책금리 인상이 금융이나 실물경제에 파급되는 영향이 비선형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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