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던 수도권 대형병원들이 소아 응급실에 이어 입원진료까지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유례없는 초저출산 현상에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소아청소년과에서 미래 비전을 찾지 못한 젊은 의사들이 발길을 돌리면서 의료공백이 불가피해졌다. 수련병원 10곳 중 8곳 가량은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부재 시 진료축소를 고려 중인 것으로 드러나 진료체계 붕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의사가 없어서요" 응급실 이어 병실도 막혔다
“의료진 부족으로 소아청소년과 입원이 잠정 중단됩니다.”
이달 12일부터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안내문이다. 전국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8곳 중 한 곳인 길병원은 이날부터 입원 환자를 받지 않고 있다. 기존에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은 지난주부터 순차적으로 퇴원시키고 병동을 비웠다. 응급실에 소아 환자가 내원하면 응급처치만 시행하고 입원진료가 가능한 지역 내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
정원이 4명인 길병원 소아청소년과는 내년 전반기 전공의(레지던트) 1년차 모집과정에서 단 한명의 지원자도 받지 못했다. 지난 2020년 전기 모집 때부터 4년째 전공의를 뽑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4년차 전공의가 전문의 시험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당장 내년 전기 지원자마저 없어 병동 운영을 잠정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병원 측은 내년 3월 전문의를 충원할 때까지 소아청소년과 입원진료를 잠정 중단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소아청소년과 인력난이 비단 길병원만의 사정이 아니다 보니 사실상 운영 재개 시점을 기약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 서울에서도 밤 10시 넘으면 소아 응급실 가기 어려워
소아청소년과 기피로 인한 진료체계 붕괴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올해 10월 24일부터 소아청소년과의 응급실 야간진료를 중단했다. 중증 외상 등 소아외과 질환을 제외한 만 16세 미만 환자의 경우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로 진료시간이 제한된다.
늦은 밤 응급실 근무가 가능한 소아청소년과 의사 수가 부족한 점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모집 정원은 12명. 1~4년차 전공의를 연차별로 3명씩 뽑고 있지만 1, 2년차 전공의가 한명도 없어 부족한 인원으로 밤낮 없이 진료를 메워온 지 1년이 넘었다. 급기야 이탈인력이 발생하자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채현욱 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장은 "전공의와 교수들이 돌아가며 야간 당직을 서다 보니 24시간 가까이 진료를 봐야 하는 날이 늘어났다"며 "외래진료나 수술에 지장을 줘서는 안된다고 판단해 안타깝지만 응급실 진료시간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대목동병원은 그보다 앞선 9월 1일부터 외상 등 중증 질환을 제외한 소아 환자의 응급실 진료를 중단한 상태다. 평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응급실을 찾는 소아청소년 환자는 외래에서 진료를 볼 수 있도록 연계하지만, 오후 5시 이후나 주말, 공휴일에는 인근 병원 응급실을 이용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대목동병원 관계자는 “4년째 소아청소년과 지원자가 없었다"며 "상주하던 전문의마저 병원을 떠나고 후임자를 찾기도 하늘의 별따기라 더 이상 소아 응급실을 운영하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4년새 지원율 63%p 급락…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기피현상 가속화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에 따르면 2023년도 전반기 전공의 모집에서 소아청소년과 지원율은 16.6%를 기록했다. 전국을 통틀어 모집 정원 199명 중 지원자가 33명에 그치면서 사상 처음 10%대로 고꾸라졌다. 2019년 80%로 처음 미달을 기록한 이래 2020년 74%→2021년 38%→2022년 27.5%로 매년 급감하는 추세다.
학회에 따르면 이미 2022년 기준 소아청소년과 근무 전공의가 한 명도 없는 수련병원은 서울이 12.5%, 지방의 경우 20%에 달했다. ‘빅5’로 불리는 서울 대형병원조차 그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서울아산병원을 제외한 4개 병원이 내년도 전기 소아청소년과 1년차 전공의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삼성서울병원은 6명 모집에 3명, 서울대병원은 14명 모집에 10명이 지원했고, 서울성모병원이 포함된 가톨릭중앙의료원은 13명 모집에 1명이 지원하는 데 그쳤다. 세브란스병원은 11명이 정원인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모집에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기피현상을 체감케 했다.
강동경희대병원, 노원을지대병원, 명지병원, 울산대병원, 충남대병원,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한림대 춘천성심병원 등은 2020년 전기 모집부터 4년째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뽑지 못하고 있다. 건국대병원, 경북대병원, 동아대병원, 분당차병원, 영남대병원, 인하대병원,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등은 3년째 소아청소년과에 지원한 전공의가 없었다. 당장 한달 뒤부턴 최고년차인 4년차만 남게 된다. 지방병원은 의료공백 우려가 더욱 크다. 전북대병원, 충북대병원을 제외한 지역 거점 병원의 경우 소아청소년과 1년 차 전공의가 한 명도 없을 정도다. 지방 거점진료 수련병원의 전공의 부재가 심화하면서 내년부턴 전국적으로 필요 전공의 인력의 39%만 근무가 가능하다. 부족한 전공의 수를 메우기 위해 교수와 전문의 당직에 의존해 온 지 2년이 넘어 지방과 수도권까지 거점 수련 병원의 응급진료 및 입원 진료량 축소가 가속화하고 있다. 실제 학회가 9월에 시행한 전국 수련병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4시간 정상적인 소아청소년 응급진료가 가능한 수련병원은 36%에 불과했다. 교수(전공의 지도전문의)가 당직을 서는 수련병원이 75%에 달하지만 입원전담전문의를 1명 이상 운영하는 곳은 27% 뿐이다.
◇ 의료계 "올게 왔다…응급실·병실 다음은 중환자실 축소 수순"
의료계는 올게 왔다는 반응이다. 학회는 올해부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수련기간을 기존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자구책을 내놨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문을 닫는 소아과 의원이 속출하는 사이 전공의 지원율은 되레 떨어졌다. 정부가 지난 8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영역에 종사하는 의료진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는 지원 대책을 내놨지만 수년간 쌓여온 현장의 갈증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나영호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장(경희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은 “저출산 기조로 소아청소년과 환자수가 줄어든 데다 코로나19 유행까지 겹치다 보니 젊은 의사들 사이에서 ‘미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인식이 생겼다”며 “업무강도가 높고 의료분쟁 부담도 적지 않아 현실적으로 유인 동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길병원 뿐 아니라 상당수 수련병원들이 인력난을 이기지 못해 진료 축소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회가 지난 9월 전국 수련병원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3년도 전공의 부재 시 진료축소를 고려 중이라는 응답은 76%에 달했다. 구체적으로는 응급진료 폐쇄 및 축소가 61%로 가장 많았고, 입원축소가 12.5%, 중환자실 축소가 5% 순이었다.
조사 당시 '소청과 입원병동을 정상 운영 중이며 2023년도 전공의가 부재하더라도 현행 체계를 유지할 예정'이라고 응답한 수련병원은 31%에 그쳤다. 나머지 69%는 '현재 축소 운영 중'이거나 '2023년도 전공의가 부재할 경우 추가로 축소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또한 24시간 소아 응급진료를 유지중인 병원 중 79%는 '응급진료를 제한 또는 축소했거나 변경할 예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도 전공의 부재 시 24시간 소아 응급진료 유지가 가능하다'는 응답은 21%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소청과 의료진 인력난에 허덕이는 수련병원들이 응급실→입원 병동→신생아중환자실 순서로 진료축소 수순을 밟게 될 날도 머지 않았다. 응급실이 아니라 아이를 받아줄 중환자실을 찾아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 정부, 필수의료 종합대책 내놨지만 현장 체감도는 낮아…"실효성 있는 해법 필요"
보건복지부가 지난 8일 공개한 필수의료 종합대책에는 소아청소년과에 대한 대안도 담겼다. 전문 응급의료센터를 확충하고 소아암 환자가 거주지 인근에서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소아암 지방 거점병원 5곳을 신규 지정해 집중 육성한다는 골자다. 내년부터 2025년까지 ‘사후 보상 시범사업’을 실시해 중증 소아환자 치료를 하는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의 적자를 일괄적으로 메꿔주는 방안도 마련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소아청소년과의 현안을 개선하려면 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진료 대란이 현실화한 만큼, 기본 입원 진료수가를 100% 인상하는 등 병원의 운영적자를 메울 수 있는 직접적인 비용 지원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나 회장은 "중등도를 고려해 가산율을 인상함으로써 한정된 의료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흉부외과, 외과에서 시행하고 있는 전공의 임금지원이 소아청소년과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청과 전공의들이 수련 받을 때 생기는 당직 부담이나 노동 강도를 줄여주려면 일선 병원들이 자체 예산으로 부담하기 힘든 입원환자 전담전문의, 응급실 전담전문의 등에 대한 인건비와 전문간호사(PA) 등 보조인력 비용지원도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충분한 보상없이 전공의들에게 과중한 업무부담을 안겨온 고질적 병폐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민구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은 "해외 주요 국가들이 상급종합병원 급의 진료를 전문의 기반으로 운영하고 전공의 연속근무를 24시간으로 제한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전공의가 대부분 환자관리와 응급처치 등을 맡고 있다"며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이 급감하면서 이 같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의 중심의 진료체계를 구축하고, 전공의들이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강 회장은 "정부의 필수의료 종합대책 수립에 대응하려면 의료인 36시간 연속근무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며 "궁극적으로 전공의들의 수련환경이 개선돼야만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 지원을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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