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 공급 과잉에 따른 ‘글로벌 치킨게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생존 기로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20일 재계에 따르면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철강·석유화학 등 한국의 수출과 경제를 지탱해온 산업이 내년부터 치킨게임 경쟁에 돌입하면서 수출 감소와 수익성 악화가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과 중국의 배터리 기업은 투자 확대와 공장 증설에 사활을 걸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삼성SDI·SK온 등 K배터리 3사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혜택을 받기 위해 2023년까지 미국에 30조 원 이상의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글로벌 1위인 중국 CATL이 포드와 미국에 합작 공장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해 중국 기업들도 독일 완성차 회사와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주력 제품인 리튬인산철(LFP)은 비용이 저렴한 데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채택을 확대하고 있어 가격 인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디스플레이는 이미 중국이 촉발한 치킨게임의 희생양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기업은 정부 보조금과 세제 지원을 등에 업고 액정표시장치(LCD) 분야에서 한국을 몰아냈다. BOE가 LCD 패널을 양산하기 위해 지은 공장 건설 비용 8조 원 가운데 지방정부와 금융기관이 90%가량을 대출했다. 중국의 원가 이하 물량 공세에 밀려 삼성디스플레이는 올해 6월 LCD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LG디스플레이는 경기도 파주의 TV용 LCD 생산 공장 가동을 연내 중단할 방침이다. 중국의 다음 타깃은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다.
석유화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요 부진에 허덕이는 가운데 중국은 코로나19 리오프닝 기대감으로 공격적인 증설에 나서고 있다. 또 탄소 중립 규제를 받는 정유회사들까지 석유화학 분야에 대거 진출해 출혈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내년 글로벌 에틸렌 연간 생산 규모는 올해보다 4.2% 증가한 2억 2799억 톤으로 추정되지만 수요는 3.5% 늘어난 1억 9300톤에 그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주력 수출산업 악화에 고금리 위기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다”며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中, OLED·배터리까지 저가공습…"韓 경쟁우위 다 사라질 판"
‘치킨게임’에 내몰린 한국 수출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는 증산 경쟁에 참여해도, 참여하지 않아도 심각한 생존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데 있다. 첨단 기술과 과감한 투자, 누적된 생산 노하우로 시장 선두권을 지켜온 국내 기업들은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그간 쌓아온 장점을 지키기 어려워진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경쟁력 유지를 위해 수익성 악화를 감수하다가는 자칫 생존의 기로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중국의 추격이 국내 기업들의 주도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 기업들은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에서 가성비 제품을 앞세워 한국 기업들을 완전히 넘어섰다. 국내 기업들은 고부가 제품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앞세워 기술 우위를 지키고 있지만 중국의 매서운 추격 속에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은 2024년까지 23곳의 공장 신증설을 추진하는 등 빠르게 생산 역량을 키우고 있다. OLED 시장에서도 성능은 다소 떨어지지만 가격이 낮은 제품을 대거 투입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가뜩이나 수요 부진으로 고심하는 국내 기업들은 공급을 줄이거나 제품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등 수익성 확보 전략을 쓰기도 어렵다.
석유화학 업계의 시름도 깊다. 중국의 공격적인 증설 경쟁으로 업황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정유 업체들까지 석유화학 사업에 진출하며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내년 석유화학 수출은 올해 예상치(561억 달러)보다 9.4% 줄어든 508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은 석유화학 내재화를 위해 수년 전부터 정부 주도로 공격적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중국의 내년 에틸렌 생산 규모는 전년 대비 11.7% 증가한 5240만 톤으로 추정된다. 중국 내수 추정치인 4560만 톤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최고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이 화학 제품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증설 투자를 주도한 탓에 수요가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의 공급 증가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화학 업체들은 공장 가동률을 낮추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며 버티기에 돌입하고 있다. 최근 친환경 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정유사들도 원유를 활용한 석유화학 사업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에쓰오일은 지난달 ‘샤힌 프로젝트’를 통해 70억 달러를 투자해 2026년부터 연간 최대 320만 톤의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한다고 밝혔다. GS칼텍스도 2조 7000억 원을 투자한 올레핀 생산 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배터리 업계에서도 정부의 과감한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으로 국내 업체들이 수혜를 볼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중국도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모습이다.
중국 배터리 업체 고션하이테크는 독일 폭스바겐과 합작법인(JV)을 설립한 뒤 23억 6000만 달러(약 3조 1000억 원)를 투자해 미국 미시간주에 배터리 소재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글로벌 1위 배터리 업체인 중국의 CATL은 미국 포드와 미국에 배터리 합작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배터리 업계도 LG에너지솔루션과 제너럴모터스(GM) 합작법인 얼티엄셀즈가 테네시주 스프링힐 배터리 공장에 2억 7500만 달러(약 3590억 원)를 추가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현대자동차가 미국에서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하는 등 투자를 늘리며 대응하고 있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은 저가형 배터리인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내세우고 있다. 한국 업체의 주력 제품인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낮아 성능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하다는 강점이 있다. 기술 경쟁력은 국내 업체가 앞서 있지만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의 공세가 거세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방안이 절실한 상황이다.
철강 업계에서는 중국이 경기부양책으로 내년 대대적인 증산에 나설 것으로 전망되면서 국내 업체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중국 열연 내수 가격은 톤당 4174위안(77만 원)으로 지난달 대비 8%가량 올랐다. 중국 열연 롤마진(판매가에서 원재료 비용 차감)도 이달 톤당 4047위안(75만 원)으로 지난 3개월간 상승 추세다. 흑자를 보는 중국 철강사 비율이 지난달 19%에서 21%대로 올라오면서 중국 철강사들의 증산에 대한 기초 체력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내 철강사는 가격 하락에 감산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가격 상승 압력이 높아지면서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유일하게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메모리반도체 1위 삼성전자(005930)는 인위적 감산 없이 투자 확대 방침을 10월부터 고수하고 있다. 중국 등 경쟁국 업체들의 등에 떠밀려 투자 확대에 나선 것이 아니라 업계 한파 속에서 자발적으로 투자·생산 기조를 유지해 가격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주도로 형성된 ‘치킨게임’ 양상이 국내 산업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이 경쟁력을 갖는 품목이 늘어나면서 치킨게임 양상이 전 산업으로 확대되는 형태”라며 “우리 기업은 생산비를 줄이거나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개발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획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정부·국회의 산업별 지원 법안 마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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