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공과대학 교수 등이 정년을 5년가량 앞두고 실험실을 폐쇄한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77세인데도 지난해까지 실험실을 운영했고 여전히 종신 교수로서 아내와 스탠퍼드대에서 과학과 예술을 융합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요.”
한국을 방문한 커티스 프랭크 미국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최근 서울경제신문 본사에서 인터뷰를 갖고 “스탠퍼드대는 임팩트 있는 연구와 기술사업화 생태계의 특징을 갖고 있다”며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혁신을 가속화하며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등의 연구 성과도 논문 쓰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며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이 되는 좋은 특허를 창출하고 기술사업화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탠퍼드대나 MIT 등 미국 대학들은 의대와 공대 등의 융합 연구와 산학 협력에 적극 나서며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어왔다”며 “한국 등 아시아 대학들이 혁신을 시도하고 있으나 도전 정신이 다소 부족하므로 앞으로 혁신 브랜드와 DNA를 갖춰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프랭크 교수는 “한국이 더 우뚝 서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혁신 생태계, 국제 협력 확대를 통해 차세대 먹거리를 적극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목적은.
△스탠퍼드대 화공과 출신 한국 연구자들과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이번에 다섯 번째로 방한했는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브레인 링크 프로그램을 통해 생명공학 관련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한국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 관해서도 발표했다.
-예술가인 부인과 컬러 그래픽 합동 강의를 한다고 들었다.
△학부생 대상인데 인기 강좌 중 하나다. (인터뷰에 동석한 부인 사라 뢰시 프랭크를 가리키며) 아내는 서예와 미술을 하는 화가이다. 15년 전 부부가 같이 ‘예술, 화학과 광기:예술 재료의 과학’을 시작으로 합동 강의를 시작했고 이후 ‘미술 재료의 탐험: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으로 발전했다. (부인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컬러 그래픽을 보여주며) 이 수업은 재료과학에 대한 제 관심과 그림·서예를 가르치는 아내의 기술을 결합한 것이다. 마치 만담하듯 가르치는데 학생들에게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학생들이 상상을 초월한 기발한 작품을 낸다. 융합이 안 될 것 같은 분야가 잘 버무려졌을 때 혁신이 나온다. 저희 부부도 학생들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재미있다.
-한국에서는 대학에서 부부가 같이 근무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렇다는 게 오히려 놀랍다. 스탠퍼드대 등 미국에서는 흔하다. 물론 저희처럼 부부가 다른 분야를 융합해 새로운 과목을 만들어 가르치는 사례는 다소 이례적이다.
-스탠퍼드대 등 미국 대학의 교육 혁신과 인재 양성 사례를 소개해달라.
△스탠퍼드대 하면 혁신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학생들은 대학과 실리콘밸리의 혁신 생태계를 접하며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 또 다른 혁신을 낳는다. 스탠퍼드대의 가장 큰 경쟁자는 MIT인데 두 대학 모두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낼 뿐 아니라 산학 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다. 졸업생들도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개발(R&D)을 하고 벤처 스타트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MIT는 스탠퍼드대보다 교원이 2배 이상 많아 논문 수와 연구비 총액에서 우위를 점한다. 스탠퍼드대는 혁신의 속도감과 생산성 측면에서 낫다. 칭화대·난양공대·도쿄대 등 아시아의 많은 대학도 혁신을 시도하고 있으나 미국과 유럽에 있는 유수의 대학에 비해서는 도전 정신이 다소 부족하다. 인공지능(AI) 투자는 MIT, 지구의 지속 가능성은 스탠퍼드대가 연구를 선도했다. 아시아 대학들도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DNA와 환경을 갖춰야 한다.
-그동안의 연구 활동을 소개한다면.
△지난해까지 실험실을 운영했는데 저희 실험실 박사 73명 중 약 80%가 기업으로 갔다. 그만큼 실용적인 연구에 집중했다. 대부분 첨단 기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물질의 분자구조, 즉 고강도 중합체에 관해 연구했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하드디스크 메모리 스토리지, DNA 유전자 칩 분석, 바이오메디컬 장치용 하이드로젤, 수소연료전지, 생분해성 플라스틱 등의 재료를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우리 몸의 세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작은 분자인 인지질도 다뤘다.
-한국에서는 공대 교수 등이 60세쯤 되면 실험실을 닫는 경향이 있는데 교수님은 만년 현역이어서 놀랍다.
△한국 교수가 정년(65세)도 되기 전에 실험실 문을 닫는다는 게 더 놀랍다.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한국에서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연구 경험과 시설을 후학에 전수해야 한다. 연구 환경이 계속 제공되면 나이와 상관없이 혁신적 연구를 할 수 있다. 미국 대학은 정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70세를 넘어도 근무한다. 스탠퍼드대 교수들은 학부생의 열정을 좋아하고 대학원생 등 젊은 연구자와 일하는 것을 즐긴다. 저는 마음만 먹으면 실험실을 더 운영할 수도 있었다. 지금도 학생을 가르치면서 스탠퍼드대 보건·안전위원회와 기업 위험관리 윤리·규정 준수 운영위원회 등에 자문한다.
-미국 대학의 연구자들은 좋은 특허를 내는 데 주안점을 둔다. R&D를 기술사업화로 연결하는 생태계를 설명해달라.
△특허를 내는 것은 혁신의 젖줄이다. 논문만 쓰는 것으로는 안 된다. 좋은 논문의 조건은 임팩트 팩터(연구의 영향력·수준·가치 등을 평가하는 지표)보다는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근간에 있다. 논문을 내기 전에 특허를 먼저 내야 아이디어 도용을 막을 수 있다. 스탠퍼드대의 기술사업화 조직(TLO)에서 이런 부분을 전문적으로 컨설팅한다. 저희 연구실도 인공 각막과 인공 추간판 등 약 20개의 특허를 받았는데 대부분 상용화됐다. 이 중에는 의대와 공대 간 융합 연구를 통한 성과도 적지 않았다. 실례로 스탠퍼드대 출신 의사를 박사과정 연구원으로 받아 인공 각막에 하이드로젤을 적용하는 등 여러 특허를 같이 창출했다. 이 학생이 졸업 후 연구를 확장해 인공 연골 전문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이 과정에서 고문 역할을 계속해왔고 로열티 수입도 올리고 있다.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학생들의 창업이 비교적 활발한데.
△스탠퍼드대 학생과 졸업생들은 창업에 관심이 많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저는 연구실에서 근본적인 기초연구를 통한 기술 혁신을 핵심 가치로 뒀다. 그동안 박사과정 출신 학생 4명이 졸업 후 스타트업을 창업할 때 연구나 네트워크 등의 측면에서 활발하게 지원했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가르치는 등 혁신을 장려한다.
-미국에는 실리콘밸리, 보스턴 바이오밸리, 리서치트라이앵글 등 산학연이 어우러지는 혁신 클러스터가 많은데.
△스탠퍼드대 공대 학장을 했던 프레드 터먼(1900~1982)은 스탠퍼드대와 지역 산업 사이에 강력한 유대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휴렛팩커드와 같은 초기 실리콘밸리 회사들이 나오도록 적극 장려했다. 이를 통해 스탠퍼드대의 성장뿐 아니라 산업 성장의 DNA를 만들 수 있었다. 혁신 브랜드를 스탠퍼드가 선점한 것이다. 그 결과 혁신 DNA를 가진 연구원과 기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보기술(IT)뿐 아니라 생명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 토목·환경공학, 재료과학 등 다양했다. 미국 주요 혁신 클러스터의 생태계를 보면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 노하우를 인정해주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도전과 모험 정신으로 상징되는 기업가정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과학기술계가 미국을 비롯해 외국과 국제 협력을 잘하고 있다고 보는가.
△많은 한국인이 미국 대학에서 유학하고 교수로 지내고 있다. 다만 더 적극적인 국제 협력이 혁신의 지름길이다. 인구 감소와 미국과 중국의 과학기술 패권 경쟁 등을 감안해 한국이 미국과 유럽 등 과학기술 선도국과의 국제 협력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 동안 해외 유학도 잘 안가는 등 연구 환경에서 다소 폐쇄적인 측면을 보였는데 한국은 보다 개방적인 국제 협력에 나서야 한다.
-한국의 과학기술계 등에 대해 조언한다면.
△한국이 더 우뚝 서기 위해서는 첨단 과학기술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세계 일등이 돼야 한다. 반도체·배터리 분야처럼 기술 기반 제조업의 발전을 뛰어넘어 AI, 에너지, 첨단 바이오, 탄소 중립 관련 기술 등 차세대 먹거리를 적극 키워야 한다. 대학의 임팩트 있는 연구와 산학 협력 활성화, 국제 교류 확대 등이 필요하다.
◆He is…
1945년 미국 미네소타주 오와토나에서 태어나 미네소타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샌디아국립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76년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옮겨 종신 교수로 56년간 재직해왔다. 이 대학에서 오랫동안 학과장, 공대 수석부학장을 지냈다. 의료용 신물질이나 반도체 소재 등에 관해 IBM·히타치 등 글로벌 기업과 같이 연구해온 스탠퍼드대 고분자조립체·표면연구센터(CPIMA) 소장을 맡았다. 국가연구위원회 고체과학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지난해까지 연구실을 운영했고 현재는 서예가이자 화가인 부인과 함께 과학과 예술 간 융합에 관해 학부 수업을 하고 있다. 미국 공학한림원 정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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