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8K 등 하이엔드급 기술을 제외하면 사실상 중국 기업들이 다 따라온 상황입니다. 기술 격차가 크지 않다면 저가로 승부하는 중국 제품의 경쟁력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나마 고부가 제품에서 기술 격차를 이루고 있지만 여기서도 중국이 매섭게 따라붙어 고민입니다.”
국내 한 디스플레이 업계 임원이 중국의 맹추격을 견제하면서 내뱉은 탄식이다. 저가를 앞세운 중국 기업들의 공세에 17년 만에 ‘글로벌 1위’를 내줬지만 이렇다 할 타개책을 찾기 어렵다며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K제조업, 중국 굴기에 벼랑 끝=업종을 가리지 않는 중국의 총공세에 국내 제조 기업들의 설 곳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천문학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은 물량 공세를 퍼부으며 한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을 곳곳에서 뺏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그동안 어렵게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지만 지원책은커녕 반기업 법안에 발목이 묶여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다.
디스플레이는 중국의 굴기에 열세로 돌아선 대표적인 산업이다. 2000년대 초반 일본과의 격전을 거쳐 글로벌 1위에 올랐던 ‘K디스플레이’는 2021년 매출액 기준으로 33.2%의 점유율로 중국(41.5%)에 밀려 2위로 밀려났다. 2004년 이후 17년 만의 일이다. 중국은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에서 한국을 완벽히 밀어낸 데 이어 OLED 시장에서도 빠른 속도로 추격해오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DSCC는 2025년 OLED 시장에서 중국이 47%의 점유율을 확보하며 한국(51%)을 가시권에 둘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중국과의 격차 해소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시장조사 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전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3사의 점유율(23.2%)이 전년 동기 대비 7%포인트 넘게 하락했다. 특히 LG에너지솔루션이 중국 비야디(BYD)에 밀려 순위가 2위에서 3위로 내려갔다. 시장점유율은 19.6%에서 1년 만에 12.3%로 7.3%포인트 떨어졌다.
반면 중국은 세계 최대 배터리 기업인 CATL이 같은 기간 점유율을 32.2%에서 37.1%로, 비야디가 8.8%에서 13.6%로 끌어올리며 격차를 벌렸다.
조선 업종에서도 중국은 양적 우위를 이어가고 있다. 영국의 조선·해운 시황 분석 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선박 수주량 기준 한국은 1564만 CGT로 37%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중국(2034만 CGT·49%)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2020년까지 3년 연속 수주 1위에 올랐지만 자국 발주 물량이 뒷받침된 중국에 2021년부터 수주 규모에서 뒤처지고 있다. 특히 한국이 독점하던 고부가가치 제품인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분야에서도 중국과의 격차가 좁혀졌다. 한국과 중국의의 LNG선 점유율은 2021년만 해도 각각 93%, 7%였는데 지난해에는 70%, 30%로 나타났다.
올해 국내 조선 업계의 보수적인 경영 기조로 인해 중국이 LNG운반선 시장을 더욱 잠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선가 하락이 우려되는 가운데 국내 조선사들이 저가 수주에 소극적인 상황인데 중국 조선사들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LNG선 수주를 확대하면 한국과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 지원 적고 반기업 법안만 가득=반도체 업계에서도 중국의 ‘굴기’는 매섭다.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은 2025년까지 1조 위안(약 184조 원)을 지원해 반도체 자급률 70%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반도체에서 미국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자체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반격에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자국 내 반도체 기업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50~100%까지 감면해주면서 적극적인 투자를 독려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중(對中)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직격타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중국 기업이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빠른 성장을 이루는 사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주력인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불황까지 겹치면서 투자를 늘릴 동력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미중 갈등으로 미국이 대대적인 견제에 나선 상황이 위기에 놓인 국내 기업들에 시간을 벌어줬다는 해석이다.
정부가 뒤늦게 국가전략기술 설비투자에 대해 최대 25%의 세액공제를 지원하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야당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난관이 남아 있다. 반도체 세액공제율 상향을 위해서는 국회 문턱을 넘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지원책 마련은 힘겹고 오래 걸리는 반면 산업계를 옥죄는 반(反)기업 법안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노란봉투법’이 대표적이다. 국회에 발의된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사측의 손실에 대해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수 없게 해 파업을 부추기는 법안으로 지목된다. 지난해 일몰된 안전운임제·특별연장근로제 법안 처리 등도 여야 갈등 속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동안 기업의 노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기업적인 제도나 법을 만들며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았나 반성해야 한다”며 “인재 유치와 양성, 기술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생태계를 이루기 위해 획기적인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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