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입장에서, 낡은 대상이 주는 감동이 더 큽니다. 내 붓은 낡지 않은 곳을 그릴 때는 잘 움직이지 않아요. 화가는 미인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작업한 제 그림들은 낡은 을지로와 청계천의 초상화예요.”
작가 정재호(52·세종대 동양화과 교수)는 오래된 아파트, 재개발로 곧 사라질 건물들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낡음은 결코 추레하거나 측은하지 않다. 늙을수록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주름처럼 정재호의 낡은 풍경에는 시간이 담기고 독특한 깊이가 쌓이며 온기마저 느껴진다. 세월을 견뎌낸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우직함이 있다. 흔적없이 허물어질테지만 ‘괜찮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종로구 팔판동 초이앤초이갤러리에서 정재호의 개인전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이 열리고 있다. 정재호는 지난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을 때 세운상가에서 바라본 재개발 지역의 풍경을 선보였고, 이후로도 5년간 을지로와 청계천의 낡은 모습들을 찾아다녔다.
갤러리 1층에 들어서자마자 첫 눈에 들어오는 2022년작 ‘모습(Guise)’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연분홍빛 건물은 세운상가 동편인 종로구 예지동을 수십 년간 지키며 근대화 과정을 목격했고, 최근 철거됐다. 지난 시간은 그림에만 남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없어지기 전에 풍경화로 더 많이 그리고 싶었다”면서 “을지로와 청계천 등 이 지역의 풍경들은 아름답게 그려진 적이 별로 없었기에, 사회적인 코드가 아닌 풍경화에서 기대하는 풍부한 감수성의 측면으로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기술이 사실적인 그림의 자리를 넘보는 시대지만, 사진은 결코 눈(目)으로 본 현장의 느낌을 다 담지 못했다. 이를테면 설경(雪景)이 그랬다. 눈 내린 풍경은 결코 시리지 않았다. 오히려 쌓인 눈이 도톰한 솜이불처럼 따뜻한 분위기(warm tone)을 만들었지만 사진은 이 풍경을 푸르스름하게만 찍어냈다. “어떻게든 눈으로 본 것을 기억해 그려내고자”한 작가의 노력으로, 지난해 설 즈음에 그린 눈 덮인 을지로의 풍경 ‘마지막 겨울’에는 노릇한 온기가 돈다. 그는 “아무리 많은 수의 사진을 찍더라도 현장에서 실제로 풍경을 대면하는 생생함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면서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풍경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여러 장의 사진을 두고 각기 다르게 표현되는 색과 빛의 조건을 따져가면서 구조들을 세우고 색과 질감을 입혀 나갔지만 다시 실제 풍경을 대면했을 때 풍경은 그림으로부터 아득하게 멀어지곤 했다”고 작가 노트에 적었다. 작가는 날씨와 계절을 바꿔가며 같은 곳을 다시 그렸다. 같은 곳의 풍경화지만 드문드문 건물 몇 개가 사라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가장 정확하게 그리려 애씁니다. 있는 그대로의 색깔과 형태와 상태가 정확하게 재현되는 순간, 초라한 풍경의 아름다운 지점이 나타납니다.” 전시는 2월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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