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자원무기화 및 우방국 간의 공급망 구축을 골자로 하는 ‘프렌드쇼어링’ 가속화와 세계무역기구(WTO) 체계가 와해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분기 기준 무역의존도가 글로벌 최고 수준인 79.7%에 달하기 때문에, 무역질서가 와해되면 상당한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 정부 또한 이 같은 글로벌 통상질서 변화에 대응해 꾸준히 신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계속되는 인력이탈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블랙스완(예상하지 못했던 이례적 사건)’ 등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불거진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관련 이슈에 정부 통상정책 역량 대부분이 투입되며, 통상정책 로드맵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23일 통상업계에 따르면 최근 통상환경 급변으로 통상교섭본부의 미래 통상전력수립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산업부가 글로벌 질서 변화에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대표적 이슈가 IRA입니다. 산업부는 지난해 8월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 주재로 국내 전기차 및 배터리 업체와 간담회를 갖고 “IRA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WTO 협정 등 통상규범 위배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IRA에 대응해 사실상 FTA와 WTO를 미국 압박용 카드로 꺼내든 셈입니다.
반면 당시 통상업계에서는 정부가 잘못된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분석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미국과의 FTA는 무역수지만 보면 우리나라에 상당히 유리한 협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 체결 당시인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의 대미 무역흑자 누적 규모만 2153억3000만 달러에 달합니다. 이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한미 FTA에 대해 ‘끔찍하다’며 결국 2018년 미국에 다소 유리한 방향으로 이를 개정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자국내 사정과 한미 양국간의 역학관계가, 국제법적 영역인 FTA 규범 위배 여부보다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입니다. 미국을 대상으로 한 IRA 관련 FTA 위배 가능성 제기가, 미국을 자극하기만 할뿐 실익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당시 제기된 이유입니다.
WTO 제소 카드에 대해서도 당시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WTO는 미국이 ‘중국에 유리한 판결이 남발된다’는 이유로 2019년 WTO의 대법원 역할을 하는 상소기구 상소위원 임명을 보이콧 하며 사실상 무력화 된 상황입니다. 우리 정부는 2021년 중국의 갑작스런 요소 수출 중단에 따른 ‘요소수 부족’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는데다 실효성 등을 이유로 WTO 측에 관련 이슈를 문제제기 하지 않은 바 있습니다.
정부가 IRA 이슈에 대해 중국 관련 이슈와 달리 WTO 제소 카드를 언급한 것에 대해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통상업계에서 제기된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당시 한 통상업계 관계자는 “안 본부장이 통상교섭본부장이 아닌 (상대국을 고려해 발언 수위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입장으로서 발언한 것 같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문제제기 때문인지 정부 당국은 불과 2주정도 후에 “IRA와 관련해 WTO 등 국제기구 제소는 최후의 수단”이라며 IRA 대응책을 수정한 바 있습니다.
IRA는 통상정책의 관련 로드맵도 흐트려놓았습니다. 산업부는 IRA 관련 대응 때문에 지난해 9월초 공개하려면 ‘새정부 통상정책방향’ 발표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습니다. 산업부의 통상정책 방향은 지난달 산업부 신년업무보고에서 △급변하는 통상환경에 대응 △신시장 개척을 위한 산업통상협력 강화 △IPEF·WTO 등 신통상규범 논의 등의 내용으로 발표됐지만, 산업과 에너지 등 여타분야에 이어 가장 후순위로 발표돼 주목도가 떨어졌습니다.
통상교섭본부는 이달 11일 새로운 통상정책 방향을 공개했지만 이 또한 구체적 이행 방안이 공개되지 않아 ‘선언전 성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정부는 FTA 대비 보다 포괄적 개념인 ‘무역투자프레임워크(TIPF)’를 비롯해, FTA 대비 공급망 등 신통상 분야 협력이 더해진 ‘경제파트너십협정(EPA)’를 신규 통상정책으로 꺼내들었지만 실제 관련 보도자료에 이를 이행하기 위한 세부 로드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실제 EPA와 같은 통상전략은 통상교섭본부 단독으로 추진해 나가기에는 지나치게 ‘거대담론’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IRA 관련 이슈 대응 문제로 산업부 내 팀장급 인사가 ‘대기발령’ 조치를 받는 등 IRA 관련 여진이 산업부 내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통상전략 변화를 정부당국이 보다 잘 팔로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미국은 WTO 등 중국이 가입된 글로벌 무역협정은 관련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를 와해하려 애쓰지만, 본인들이 새로게 구상한 통상질서는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우방국 중심의 ‘프렌드쇼어링’ 전략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개정해 2020년 출범한 USMCA가 대표적입니다. 미국은 USMCA 조약에 근거한 자동차 원산지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얼마전 공개된 판결문에 따르면 미국은 USMCA의 판정을 부정하지 않고 캐나다와 멕시코 등과 협업해 해결방안을 찾겠다는 입장입니다. WTO 판결 때 마다 효력을 부정하던 것과 비교하면 온도차가 상당합니다. 미국은 유럽과 체결한 무역기술협의회(TTC)는 물론 일본, 한국, 대만 등 4자간 반도체 협력체인 ‘칩4(팹4)’ 등 자신들이 주도한 규약에서는 USMCA와 비슷한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여기에 더해 산업부 내 통상핵심 인력이 이탈이 가속화 되고 있는 점도 통상교섭 본부의 걱정거리 중 하나입니다. 지난해 1월에는 통상교섭본부 산하 에이스로 분류됐던 실장급(고공단 가급) 인사가 S그룹으로 이동했으며,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 등으로 산업부내 통상분야에서 첫손에 꼽혔던 핵심인력(과장급) 또한 지난해 6월경 또 다른 S그룹으로 이직했습니다. 일본과의 수산물 분쟁에서 완승을 이끌어내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렸던 국제법 최고 전문가인 모 과장 또한 지난해 6월 산업부를 떠났으며, 통상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과장급 인사 두명은 순환보직 정책에 따라 지난해 비통상부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여기에 산업부 내에서 차기 통상교섭본부장 1순위로 거론됐던 고위급 인사 또한 최근 퇴직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핵심인력유출이 계속되는 모습입니다.
산업부 내 분위기를 종합해 보면 이 같은 통상본부 인력 유출은 예정된 결과입니다. 통상본부는 여타 실·국 대비 다소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낮은 선호도는 산업부 내 통상본부 역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산업부는 1993년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동자부)가 통합해 ‘상공자원부’가 됐으며 이듬해 ‘통상산업부’로 다시 간판을 바꿨습니다. 이후 1998년 통상 기능을 외교부에 빼았기며 ‘산업자원부’가 됐습니다. 2008년에는 부처명을 ‘지식경제부’로 바꿨다가 2013년 통상 기능을 외교부에서 되찾아오며 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가 됐습니다.
산업부는 지금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통상산업부 시절부터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상공부 출신이 훨씬 우대를 받았습니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에너지 분야의 중요성이 커지며, 산업부내 에이스급 인사들이 에너지 관련 커리어 확보를 위해 인사희망시 에너지쪽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실제 이전 정부의 마지막 산업부 차관 2명(박진규·박기영)은 모두 동자부 출신이었으며, 기재부 출신이 사실상 독점하던 청와대 경제수석에 산업부 출신으로 이름을 올려 주목을 받았던 박원주 전 수석 또한 동자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에너지쪽 커리어가 없으면 1급 승진 시 불리하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돕니다.
반면 산업부내 에이스급 인력들의 통상 관련 커리어는 살펴보면 길어봐야 1~2년 정도입니다. 산업부는 관료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최소 2~3년간 한 부서에서 근무토록하는 인사혁신안을 시행할 방침이라 오히려 통상에 대한 비선호도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통상 쪽 선호도가 떨어지는 배경에는 5년마다 반복되는 ‘분가(分家)’ 관련 논쟁도 상당부분 작용합니다. 산업부는 2013년 통상기능을 다시 되찾아왔지만, 매 정권 출범때마다 외교부 측과 ‘솔로몬의 지혜’ 에피소드에 나오는 친모 찾기가 연상될만큼 ‘통상은 우리 것’이라는 논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산업부 인력구성에서도 드러납니다.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출범 당시 외교부에서 넘어온 인사들은 극히 일부였으며, 현재 이들 중 국장급(고공단 나급) 이상의 보직을 맡고 있는 이들은 3명에 불과합니다. 이전 정부 시절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산업부 내 원하는 인재를 확보하지 못해, 당시 산업부 차관과 얼굴을 붉혔다는 일화는 산업부 내에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다수 전문가는 매 정권 출범때마다 반복되는 ‘통상기능의 외교부 이전’ 논쟁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고 조언합니다. 이미 팹4와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의 이슈로 통상과 산업부문간의 연결성이 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대중국 포위망으로도 불리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겡제프레임(IPEF)의 4대 핵심분야는 △무역 △공급망 △청정에너지·탈탄소·인프라 △조세·반부패 등 4가지로 기획재정부가 담당하는 조세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산업부 소관입니다.
무엇보다 IPEF는 우리나라의 산업통상자원부와 역할이 같은 미국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가 아닌 상무부가 전면에 나선 배경에는, 미국이 군사력이 아닌 공급망 등 경제부문을 중심으로 글로벌 판도를 재편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이에따라 쿼드(QUAD) 같은 명백히 군사·외교적 성격을 띄고 있는 사례를 제외하면 향후 미국 등 주요국이 내놓을 각종 협의체 또한 산업이나 공급망 관련 모임이 대부분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