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는 ‘발왕산’이라는 산이 있다. 해발고도 1458m로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원래 이름은 팔왕산(八王山)이었는데 어느 시기에 앞의 음과 뜻이 바뀌어 발왕산(發王山)이 됐다고 한다. 어쨌든 왕이 날 만한 터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이런 산골에서 무슨 왕이 태어날까. 역사상 그런 적이 있었나. 강원도의 해석은 이렇다. 음악이나 체육·연예계에서 각 분야의 최고를 ‘왕’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 최고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산의 ‘기’가 세다는 의미다.
왕의 기운이라는 것과 관련해 발왕산 아래에 있는 용평리조트 스키장이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의 무대였고 또 2002년 한류를 전 세계에 알린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였다는 것이 실제 사례라면 사례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발왕산을 찾아가봤다. 발왕산은 이미 겨울 왕국으로 변해 전 세계의 여행객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발왕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북쪽 등반로인 ‘발왕산 엄홍-길’이다. 바로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엄 대장이 등산하고 호평한 길이라고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등산에 자신이 좀 없다면 용평리조트에서 시작되는 케이블카를 타면 된다. 물론 케이블카는 리조트 사용과는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다. 주행거리가 3700m인 케이블카는 굽이굽이 언덕들과 스키 코스를 지나며 약 20분 만에 정상까지 데려다준다.
발왕산 정상에는 ‘기(氣) 스카이워크’라는 전망대가 있다. 국내 최고 높이의 스카이워크라고 한다. 스카이워크 끝에 서면 백두대간 자락이나 동해안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겨울철에는 상상 이상의 강풍이 불어 오랫동안 서 있기 힘들다는 것이 다소 어려운 점이다.
스카이워크 아래는 발왕산의 최고 자랑이기도 한 ‘천년주목숲길’이 이어진다. 평창군·산림청 등의 지원으로 지난해 7월 2.5㎞의 무장애 데크길로 조성됐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이곳에 여행객이 뜸한 상황을 이용해 공사를 완료했다고 한다.
데크길을 따라가면 1800년 역사의 주목들을 만날 수 있다. ‘어머니 나무’ 격인 야광나무 안에서 ‘자녀 나무’ 격인 마가목 씨가 발아해 야광나무 몸통 속으로 뿌리를 내린 우리나라의 유일한 ‘마유목’을 비롯해 흙이 아닌 바위에 붙어서 뿌리를 뻗은 모양이 왕발처럼 생긴 강인한 생명력의 ‘왕발주목’, 딱 한 사람이 들어가 설 수 있는 공간을 가진 ‘고해주목’, 큰 가지의 모양이 8자라서 영험하다는 ‘8자주목’ 등이 이어진다.
또 몸통 가운데에 다른 나무를 키워낸 ‘어머니왕주목’, 듬직한 모습의 ‘아버지왕주목’도 있다. 용평리조트 관계자에게 ‘어떻게 이렇게 특이하게 이름을 지었나’라고 물으니 “주목들의 소리를 듣고 따라 지었다”고 답한다.
주목 외에도 영물로는 왕수리부엉이가 있다. 숲 한쪽에는 과거 아버지왕주목에 둥지를 틀었던 왕수리부엉이 사진이 걸려 있다. 현재 다른 나무로 이사 갔다는데 부엉이의 새 ‘주소지’는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용평리조트 내에는 부엉이 굿즈가 많다.
요즘 핫한 곳은 알파카와 독일가문비나무숲을 품은 애니포레다. 등산로 ‘엄홍-길’을 따라 올라가면 되지만 더 편리한 방법은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것이다. 중턱에 올라 ‘발왕산 알파카 목장’이라고 커다랗게 적힌 출입구를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울창한 독일가문비나무숲이 펼쳐진다. 쭉쭉 뻗은 나무들이 발왕산의 뛰어난 기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애니포레 역시 팬데믹 기간인 2021년에 문을 열었다. 원래는 화전민이 사는 곳이었는데 1960년대 이들이 이주한 후 독일가문비나무가 식재됐고 현재는 국내 최대 군락지가 됐다. 이를 이용해 동물과 나무들의 테마 공원 애니포레가 탄생했다. 사랑하는 이들이 손을 맞잡고 걷는 연인사이길, 숲의 경사를 극복하며 계단을 오르는 챌린지 180계단 등도 있다.
정문 이름이 ‘알파카 목장’인 것은 알파카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웹툰 작가 기안84가 나온 여행 예능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페루·볼리비아 편’에서 인기를 끈 귀여운 알파카를 실제로 볼 수 있다. 기안84가 알파카와 같이 사진을 찍으려고 왜 그리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알파카 외에도 토끼·양 등 여러 동물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발왕산 스카이워크는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동해와 백두대간을 밝히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그만큼 좋은 날씨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 새벽 산을 오르고도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글·사진(평창)=최수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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