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중소기업은 신생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컨설팅 업체로부터 ‘컨설팅 의뢰 요구’를 받고 진땀을 뺐다. ESG 전담 부서는커녕 인력조차 갖추지 못한 작은 기업이 ‘ESG 등급이 낮으니 컨설팅을 받을 필요가 있다’며 거액의 비용을 제시했다. 가뜩이나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효과도 알 수 없는 컨설팅에 거액을 쓸 수 없어 결국 거절했으나 ‘ESG 성적’ 매기기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2018년부터 ESG 경영 바람이 부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ESG 평가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외 ESG 평가 기관이 난립하면서 ESG에 대한 개념과 기준이 제각각인 터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평가 근거를 확인하려면 추가 비용까지 컨설팅 명목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다. 전 세계적으로 ESG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에도 압박이 커지는 가운데 투명한 기준 공개와 정부의 맞춤형 지원책으로 기업들의 대응 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뢰도 잃어가는 ESG 평가 업계=ESG 업계가 돈벌이에 혈안이 되다 보니 국내 평가 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기업이 국내 ESG 평가 기관의 평가 과정과 등급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신뢰도 있는 평가 기관을 묻는 질문에 국내 기관(KCGS·한국ESG연구소·서스틴베스트)을 꼽은 기업은 10곳에 불과했다. ESG에 실무 인력과 비용을 대거 투입하고 있는 대기업 15곳 가운데 80%에 달하는 12곳이 국내 기관이 아닌 해외 기관을 뽑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컨설팅해주는 사업을 주요 수익 모델로 삼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국내 평가 기관들은 ESG 평가 사업뿐 아니라 컨설팅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고 있다. 컨설팅 사업은 공적 성격을 갖고 있는 KCGS를 제외한 주요 평가 기관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다. 한국ESG연구소의 경우 모기업인 대신경제연구소에서 ESG, 기업 지배구조 컨설팅 사업을 진행 중이다. 서스틴베스트는 ‘기업 솔루션’ 사업을 진행하면서 기업들에 ‘ESG 진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구체적인 평가 기준이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기업은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평가 기관에 ESG 컨설팅을 의뢰하고 있다. ESG에 대한 개념이 불명확하고 광범위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평가 기관에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아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조사 결과 ESG 외부 비용이 있는 기업들의 지난해 평균 지출은 1억 3400만 원으로 집계됐다. 사업체 규모에 따라 컨설팅 비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업계는 대략 1000만 원 단위로 계약이 진행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따로 컨설팅이 필요 없다고 해도 평가 기관들의 평가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컨설팅 명목으로 추가 비용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평가 기관이 컨설팅 사업까지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기업들이 평가에 불만이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확하게 기준이나 평가 과정을 공개하고 기업들은 투명한 피드백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런 것들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中企…“지원책 절실”=문제는 중소기업이다. ESG 평가에 대한 기준이 제각각인 데다 영리적인 성격까지 띤 상황에서 중소기업에도 ESG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면서다. 종전까지는 대기업만 ESG의 실질적인 영향을 받았다면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실사 지침 등의 영향으로 ESG 생태계가 중소기업으로까지 넓어진 탓이다. 당장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제각각인 가이드라인조차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EU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라면 이들의 협력 업체까지 ESG 리스크를 직접 진단 혹은 실사한 후 관련 내용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를 추진 중이다. 실제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협력 업체에 대한 자체 ESG 평가를 계약에 반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1년부터 ESG 리스크 진단 항목을 공급망 종합 평가에 추가했다. 삼성전자는 2021년 82개 기업을 대상으로 등록 평가를 진행했는데 이 가운데 노동 인권 부문에서 문제가 발견된 6개사와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ESG를 둘러싼 대내외 압박이 거세지고 있지만 중소기업의 대응 여력은 태부족 상태다. 대기업 15곳은 1곳을 제외하고 모두 ESG 전담 부서를 운영 중이다.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17~20명까지 인력을 두고 있다. 반면 중소기업은 정식 부서를 만든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15곳 중 3곳만 임시 부서를 운영 중이었으며 인력도 2~3명에 불과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현재 중소기업 입장에서 공급망 실사에 따른 대기업들의 평가에 응하는 것이 가장 큰 현안이지만 이런 평가에 대응하는 것 자체가 생소한 경우가 많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해외에 납품하는 협력사들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해줘야 업계의 혼란과 피해가 적을 것이며 충분한 대응 여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ESG 현안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최대한 빠르게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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