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이 경매거래를 중심으로 조정기에 돌입한 것은 분명하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추산한 2022년 국내 미술시장 총 거래액은 1조 377억원으로 사상 처음 1조원 돌파를 이뤘으나 경매를 통한 판매액은 2335억 원으로 전년 대비 30.9% 감소했다. 이처럼 경제성장 둔화로 호황세가 꺾이면 오히려 미술품 매수의 기회가 온다. ‘불황에 사서 호황에 팔라’는 격언이 미술시장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조정기 경매시장은 희귀작을 불러낸다. 케이옥션(102370)은 2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본사에서 진행하는 2월 메이저경매에 총 78점, 약 45억 원 어치 작품이 출품하면서 박수근(1914~1965)의 1950년대 작품 ‘노상’을 대표작으로 내세웠다. 1995년 갤러리현대가 기획한 박수근 30주기 기념전과 1999년 호암갤러리(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의 전신)의 박수근 전시를 비롯해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박수근:봄을 기다리는 나목’까지 주요 전시에 빠짐없이 등장한 작품이다. 25×20㎝ 크기에 추정가는 4억5000만~8억원이다. 박수근은 삶터이자 쉼터인 길거리, 즉 ‘노상’의 풍경을 자주 그렸다. 흰 한복 차림으로 길 너머를 바라보고 앉은 세 여인의 시선은 머지않아 다가올 봄날인 희망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박수근 그림의 선(線)은 화강암에 새긴듯한 강인함이 특징이지만, 이 그림의 경우 굽은 등·팔꿈치·옷 주름의 선에서 섬세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서울옥션(063170)은 28일 총 144점, 약 106억원 어치를 출품하는 올해의 첫 메이저 경매의 대표작으로 천경자(1924~2015)의 출세작 ‘정(靜)’을 내놓았다. 천경자는 1952년 개인전에 35마리의 독사가 뒤엉킨 ‘생태’를 선보여 유명세를 얻었고,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 작품으로 명성을 견고히 했다. 붉은 기운 가득한 배경 속에 단발머리 소녀가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데, 소녀가 놀란 듯 옆으로 돌린 시선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큰 꽃이 아래를 향한 해바라기, 붉은 색과 대조를 이루며 발 앞에 핀 흰 꽃과 푸른 줄기가 상징성을 품고 있는 듯 호기심을 자아낸다. 구도의 완결성과 색채의 조화가 우수하며, 천경자의 대표작인 ‘여인상’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됐음을 확인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을 통해 전통 채색화를 익힌 천 화백은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 고향을 떠나 상경한 상태였고, 전통적 여인상과 신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고민을 확장시키던 때라 작품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천경자는 자신의 수필에서 감정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1955년 무렵을 회고하며 “울면서 작품을 완성해” 대한미술협회전에 냈다고 적었다.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나 공개 전시된 적 거의 없던 이 작품은 지난해 9월 롯데백화점이 기획한 ‘재현과 재연’전에 출품돼 까르띠에와 불가리 매장 사이 붉은 벽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162.5×85cm 크기에, 추정가는 9억~12억원이다. 불황 후 반등 사례로 천경자의 1978년작 ‘초원Ⅱ’(105×129㎝)는 2007년 호황기 때 12억원에 팔린 작품이 뉴욕발 금융위기로 경색 국면에 접어든 2009년에 리세일로 12억원에 거래된 후, 시장 회복이 진행된 2018년 경매에 다시 나와 20억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 기록을 썼다.
서울옥션의 고미술 풀품작도 눈여겨 봐야 한다.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 불염재 김희겸의 작품이 처음 경매에 나왔다. 실존 인물의 초상화를 풍속화 양식에 결합한 ‘석천한유도’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도 대여된 이력이 있는 귀한 작품이다. KBS의 TV쇼 진품명품에 나와 약 10억원의 가치로 평가된 적 있지만, 이번 경매 추정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양사 경매 출품작들은 경매 당일까지 프리뷰 전시를 통해 실물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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