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가 특별한 고통을 겪지 않고 물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커지고 있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장 보뱅 투자연구소장은 2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외신센터에서 ‘2023년 경제 전망’을 주제로 열린 간담회에서 “인플레이션은 2%까지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이에 물가가 낮아지려면 경제가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며 최근 불거진 연착륙론을 일축했다. 보뱅 소장은 “고용 시장과 경제지표가 호조를 보일수록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할 일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라며 “최근의 경제지표 호조는 고통의 시간을 미루는 것”이라며 침체 가능성을 높이 판단했다.
블랙록은 지난해 말 기준 약 8조 5900억 달러(약 1경 1194조 원)의 자산을 관리하는 글로벌 운용사다. 그는 이곳에서 경제·금융 연구와 함께 장기 포트폴리오 구성 업무를 맡고 있다. 2014년 블랙록에 합류하기 전 캐나다은행 부총재를 지냈으며 캐나다 재무부 소속으로 주요 7개국(G7)과 주요 20개국(G20)의 금융안정위원회 캐나다 대표를 맡기도 했다.
보뱅 소장은 미국 경제의 낙관론을 경계하는 배경에 대해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구조적인 변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충격과 주요 국가들의 지정학 갈등에 따른 세계화의 후퇴, 친환경 에너지 전환에 따른 비용 증가가 세계의 공급 능력을 구조적으로 억누르게 됐다는 것이다. 보뱅 소장은 “이런 변화는 공급의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수준이 아니라 세계가 공급 타격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며 “수요 변화가 인플레이션을 좌우하던 과거 40여 년과 달리 이제는 공급 불안정이 세계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먹혀들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통화정책은 금리를 통해 수요를 조절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공급발 인플레이션을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뱅 소장은 “부족한 공급에 맞춰 경제활동을 누르고 눌러야 한다”며 “이에 대한 경제적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플레이션을 허용할 경우 침체를 감수하는 것보다 경제적 비용은 더욱 크다”며 “연준 입장에서는 물가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 결과 침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시점은 올해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보뱅 소장은 “부동산 등 일부 영역에서 둔화가 나타나지만 아직 고통이 본격화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팬데믹 시절 미국인이 쌓아둔 초과 저축이 연내 소진되는 시기에 그동안의 금리 인상 효과가 본격화할 수 있고 그때 경제적 고통이 명백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뱅 소장은 이런 전망을 바탕으로 자산 투자에 대한 시각을 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관심을 가질 만한 자산군으로 단기 미국 국채와 신흥국 주식을 꼽았다. 그는 “(6개월물 등) 미국 단기국채의 수익률은 현재 5% 수준으로 이는 한 세대에 한 번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지목했다. 신흥국의 경우 중국 리오프닝의 영향에 따라 경제가 상대적 호조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보뱅 소장은 특히 한국에 대해 “지리적인 거리가 가까울수록 중국 경제 재개 효과가 더 직접적일 수 있다”며 “이는 한국에 단기적인 경제성장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선진국 증시의 경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현재의 주가는 미국 기준금리가 연내 0.75%포인트 낮아질 것이라고 봤던 지난달 매겨진 가격”이라며 “미국 증시는 다가올 경제적 고통을 아직 가격에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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