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對中) 제재와 코로나19 영향으로 지난해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중국법인의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이 와중에 미국 정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 내 공장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한도를 설정하겠다고 밝혀 사업 불확실성 확대 등 2차 파장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24일 삼성전자 등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판매를 맡은 삼성전자 중국 상하이법인(SSS)의 지난해 매출은 21조 3706억 원으로 전년(32조 3261억 원) 대비 10조 원 가까이 줄었다. 낸드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삼성전자 시안법인(SCS)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6338억 원에 그치며 전년(1조 7088억 원) 대비 3분의 1토막이 났다.
SK하이닉스 중국 반도체법인의 상황도 비슷하다. D램 공장을 운영하는 SK하이닉스 중국 우시법인의 지난해 매출은 9조 5242억 원으로 2021년(12조 9389억 원)에 비해 26.4% 하락했다. D램을 만드는 생산법인은 지난해 4600억 원이 넘는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의 기술 업그레이드를 제한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국내 반도체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앨런 에스테베스 미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은 23일(현지 시간)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워싱턴DC에서 개최한 한미 경제안보 포럼에서 ‘삼성과 SK에 제공한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 1년 유예가 끝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기업들이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수준에 한도(cap on level)를 둘 가능성이 크다"고 답했다. 일정 기술 수준 이상의 첨단 제품은 생산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제재가 현실화할 경우 국내 반도체 기업의 미세공정 전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추가 투자와 판매 확대도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국내 기업의 피해가 없도록 (우리 정부가) 협상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서 각각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유일한 낸드플래시 해외 거점인 시안 공장은 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27만 장의 낸드를 생산한다. 삼성전자 전체 낸드 생산량인 월 68만 장의 40% 수준이다. 이곳에서는 삼성전자의 96~128단 낸드플래시가 제조된다.
SK하이닉스는 우시 D램 공장, 충칭 후공정 공장, 인텔로부터 인수한 다롄 낸드 공장을 운영한다. 우시 공장은 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18만 장의 D램을 만드는데 회사 전체 D램 생산량의 48% 정도다. 2020년 인텔에서 인수한 다롄 공장도 월 10만 장 규모의 낸드플래시를 양산하고 있다. 이런 규모의 생산을 하기까지 두 회사가 중국에 쏟아부은 투자액은 상당하다.
미국이 중국에 가하는 규제의 여파는 곧장 피부로 느낄 정도다. 이미 지난해 실적은 급감했고 앞으로는 기술 투자에 이어 생산 제약까지 예고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투자는 물론 생산 제약까지 현실화할 경우 솔직히 그 악영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까지는 아직 아니지만 관계자의 발언처럼 실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입는 타격이 엄청날 것이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두 회사는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시로 진행해야 하는 공정 전환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 업체들의 중국 공장은 지난해 10월 시행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의 1년 유예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비 수입 등은 쉽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공장을 수시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최첨단 D램·낸드의 공정 전환 속도가 빠를수록 기술 경쟁력 확보는 물론 높은 이윤 창출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회사의 중국 반도체 거점인 우시·시안·다롄 공장에서도 공정 업그레이드와 장비 유지 보수가 계속 이뤄지고 있다. 메모리 사양이 올라갈수록 공정 수도 늘어나면서 더욱 많은 수의 첨단 장비가 필요하다. 이 고도화 장비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램리서치·KLA 등에서 공급받는다. 하지만 일정 기술 수준 이상의 반도체 생산을 제약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은 공정의 업그레이드를 막는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두 회사가 미국 제재의 영향으로 공정 전환, 증설에 필요한 미국 장비를 중국에 들일 수 없다면 전체 제품의 40~50%가량을 기술 진보가 없는 레거시 제품 위주로만 생산하게 되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최근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는 극자외선(EUV)용 노광기에 대한 미국 주도의 대중 제재와 우시 공장 도입과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에 “미국·네덜란드와 같이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니 상황에 맞춰 전략을 세워야 한다”며 “현재는 EUV가 못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해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탈중국 중심의 반도체 생산 거점 다변화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현지의 생산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이미 천문학적인 투자를 했다.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2012년 중국 시안 1공장에 180억 달러(약 12조 원), 2017년 시안 2공장에 70억 달러(약 8조 원)를 투자했으며 2019년 80억 달러(약 9조 6000억 원)를 추가 투입해 규모를 확장했다. SK하이닉스의 우시 D램 공장에도 총 5조 원에 달하는 투자가 이미 이뤄졌다.
한편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를 받는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 장비의 수입길이 막히자 생존의 기로에 섰다. 미국국제무역위원회(USITC) 데이터웹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55.99% 감소한 6억 4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조 바이든 행정부가 18㎚(나노미터·10억 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 이하 시스템반도체 생산 장비를 규제하면서 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액도 대폭 내려앉은 것이다. 미국 반도체 장비사 외에 미국과 공급망 동맹을 맺은 일본·네덜란드 기업들도 중국 전역에서 장비 납품을 중단했다. 여기에는 EUV 장비를 세계 독점으로 생산하는 노광 장비 기업 ASML도 포함됐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 YMTC 등 주요 메모리 업체들은 기존에 구매했던 장비들을 분해해 부품 유지 보수에 활용하는 등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중국 업체들이 일단 버티면서 현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국이 규제를 강화할수록 중국 업체들이 불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