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가 발표한 300조 원 규모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계획에서 이목을 끈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20년이라는 투자기간이다. 연간 평균치로 나누면 15조 원. 물론 막대한 액수지만 삼성전자의 연평균 투자금액(약 50조 원)에 견주어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왜 20년일까. 삼성을 잘 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략적 판단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반도체 업황, 미국과 중국, 여기에 유럽연합(EU)까지 가세한 반도체 패권갈등, 윤석열 정부의 투자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일단 판은 깔아놓되 속도조절의 여지를 남겨뒀다는 것이다. 일본 산요전기와 손잡고 TV와 라디오를 조립하던 공업회사로 출발해 이제는 국가안보의 핵심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의 고충을 새삼 헤아려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교롭게도 앞으로 20년이라는 기간은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그야말로 생존이 걸려있는 기간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45년 기준 우리나라 총인구(약 4790만명) 중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40%에 이른다. 통계청 추계는 그나마 낙관적인 수치(합계출산율 0.84명)로 가정한 것인데도 이 정도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이었고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기간 삼성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올해 55세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7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들고 그 즈음이면 삼성도 총수 경영에서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무게추가 옮겨갈 것이다. 이 회장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더 이상 경영권 승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최고세율이 60%에 이르는 우리 상속세법상 승계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이사회 경영은 곧 주주들의 입김 확대를 의미한다. 국민연금은 물론이고 해외 기관투자가들도 삼성 경영에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블랙록 같은 민간 대형 기관투자가들이 보유한 글로벌 기업의 지분은 통상 15~2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한 사모펀드(PEF) 운용사 대표는 "삼성이 유지하는 공채 같은 제도는 해외 투자가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눈에는 공채나 정규직과 같은 제도 자체가 이익 극대화에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20년 뒤 한국과 삼성에 과연 성장 에너지가 남아있을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여기에 해답을 내놓는 게 이 회장의 시대적 소명일 것이다. 신약 개발에 성공해 K-바이오산업의 도약을 이루고 반도체에서는 지금의 초격차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정치권도 최소한 삼성의 뒷다리를 잡지는 말아야 한다. 적어도 삼성을 친자본·반노동의 악당으로 보는 시대착오적 망상은 멈출 때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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