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핵심지 빌딩과 호텔 가격이 급락하면서 해외부동산 펀드 환매 연기 소식이 줄을 잇습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런던, 파리. 듣기만 해도 눈앞에 풍경이 그려지는 세계적인 도시들입니다. 요즘 이곳에 투자했던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통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미국 상업용 부동산(CRE) 시장 분위기가 심상찮기 때문입니다. 금융 위기가 발발한다면 CRE가 뇌관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CRE는 시장 규모만 5조 6000억 달러(약 7282조 원)에 달합니다. 앞으로 3년 사이 절반 가까운 자금의 만기가 돌아오는데 고금리 환경, 높은 공실율에 CRE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입니다. 원금 손실 가능성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내 해외부동산 펀드 설정액은 약 70조 원에 달합니다. 특히 2017~18년을 전후로 집중적으로 자금이 몰렸는데 올해부터 속속 만기가 돌아온다고 합니다.
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기준 해외부동산 펀드 설정액은 72조 9326억 원입니다. 2015년 연말만 해도 해외부동산 펀드 설정액은 11조 2779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불과 7년 만에 7배 가까이 폭증한 것이다. 어림잡아 매해 해외부동산 펀드에 유입된 돈만 약 10조 원에 달합니다. 해외부동산 펀드는 국내 기관투자자의 자금이 대거 몰리며 몸집을 급격히 키워나갔습니다. 2018년 초에는 해외부동산 펀드 설정액이 30조 원원대로 진입하면서 29조 원 규모였던 국내 부동산펀드를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기관투자자는 앞다퉈 해외부동산 펀드를 포트폴리오에 담았습니다. 미국 오피스와 호텔을 편입한 펀드를 집중 공략했습니다. 연기금, 공제회 등 기관투자자가 돈을 대면 국내 증권사와 운용사는 이들의 입맛에 맞는 자산을 찾아 미국 CRE 시장을 종횡무진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수도 뉴욕, 뉴욕의 심장이라는 맨해튼, 글로벌 정보통신(IT) 허브인 샌프란시스코, 미국 정치 1번가 워싱턴 소재 빌딩과 호텔을 자산으로 편입한 대출 펀드와 리츠가 설정됐다는 소식이 줄을 이었습니다.
2010년 중반부터 시작해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번진 2020년 초까지 해외부동산 펀드의 양적 성장이 눈부신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양과 속도에 지나치게 집중했던 탓에 질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습니다. 해외대체투자 부실 점검 보고서를 작성한 박해식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해외부동산 펀드는 미국과 유럽의 상업용 부동산 투자에 80%가 집중돼 있다”며 “대부분이 변제순위가 낮은 지분투자나 메자닌 대출 형태의 고위험 익스포저로 구성되어 있어 부실화 시 투자자금 회수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국내 투자은행(IB) 업계가 광범위하게 해외부동산 투자에 뛰어든 역사는 길게 잡아도 채 10년이 되지 않습니다. 해외부동산은 특히 현지 사정에 능통한 전문가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내 IB는 영업 실적 늘리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업무 연관성이 떨어지는 인력도 대체투자 전문가로 둔갑시키고 조직 외양만 키운 채 영업을 계속했습니다. 이는 결국 제대로 된 실사도 없이 현지 브로커가 가져오는 투기등급 물건을 해외부동산 펀드에 편입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국내 기관 투자자 역시 해외부동산 펀드 내 자산 가치를 평가할 능력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 였습니다. 투자제안서 등 서류 몇 장, IB의 기존 평판에 의존해 자금을 집행했습니다. 펀드 만기가 끝나는 5~6년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당시 묻지마 해외부동산 투자에 나섰던 기관들은 최근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늘 만실일 것만 같던 미국과 유럽 핵심지 상업용 부동산 공실률이 치솟기 시작하고 금리는 불과 1년 사이 5%대까지 올랐습니다. 글로벌 상업용 부동산회사 쿠시먼 앤드 웨이크필드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맨해튼 오피스 공실률은 18.2%였습니다. 지난 2003년 17.6% 이후 최고치입니다. 해외부동산 가치는 속속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가격은 우하향 그래프를 그리며 빠지는 중입니다. 2017~18년 설정된 해외부동산 펀드의 만기가 지난해부터 돌아오는 중이고 상환연기 및 기한이익상실(EOD) 상태로 빠졌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옵니다. 그 중에 몇몇 펀드는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처했다고도 합니다. 부동산펀드는 5~6년 정도인 펀드 설정 기한이 지나면 자산을 매각해 원금을 상환하고 차익에 해당하는 수익을 분배 받습니다. 이 시기 편입한 자산 가치가 투자 시점 대비 하락하면 원금을 잃게 됩니다.
문제는 앞으로 해외부동산 가치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선진국 핵심지 빌딩의 공실률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기 침체 우려에 기업들은 대규모 감원, 긴축 경영을 단행 중입니다. 오피스 빌딩 수요가 떨어진 것입니다. 펀드 환매 시기가 도래하면서 IB 업계는 수익자들에게 만기 연장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수익자인 기관투자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금 손실을 보면서까지 펀드 자산을 매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일지 모를 원금 회복의 날을 기다리며 무작정 버티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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