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와 인근 서부 상업지역인 라데팡스지구가 국내 증권사들의 ‘부동산 투자 부실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9년 해외 부동산 투자 열풍 속에 저금리로 현지 상업용 빌딩을 5조 6000억 원어치나 사들인 대형 증권사·기관들이 이제는 고금리와 높은 공실률에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서울경제신문 취재에 따르면 미래에셋증권(마중가타워), 대신증권(CBX타워), 한국투자증권(투어유럽빌딩), 메리츠·NH투자증권(투어에크호빌딩) 등 5개 증권사는 라데팡스지구에서 2조 7000억 원을 들여 매수한 건물 지분을 여전히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2019년에 현지 부동산을 매입해 일부 지분은 펀드나 국내 기관에 재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한국투자증권은 2019년 말 투어유럽빌딩 지분 일부를 군인공제회 등에 되판 것으로 전해졌다.
하나증권(CBX타워), 삼성증권(뤼미에르·크리스털파크빌딩)도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에 건물을 샀다가 4년간 각종 국내 기관에 투자 지분 2조 9000억 원어치를 완전히 다 처분했다. 삼성증권과 뤼미에르빌딩에 함께 투자한 한화투자증권은 지분 90%를 다른 기관에 재매각하고 10%만 현재 쥐고 있다. 증권사들이 파리와 라데팡스지구에서 매입한 5조 6000억 원 규모 해외 부동산 투자금이 금융투자 업계를 넘어 국내 투자 기관 곳곳에 ‘폭탄 돌리기’처럼 산재해 있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특히 코로나19 이후 현지 상업 부동산 환경이 점점 악화하면서 부실 위험이 커지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대형 증권사가 투자한 건물들의 공실률은 15~17% 수준의 투어에크호빌딩을 비롯해 대다수가 두 자릿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프랑스 내 경기 둔화 흐름을 감안할 때 CBX 등 아직 공실률이 낮은 부동산들의 상황도 언제 반전될지 모른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올 1월 현지 부동산 전문 매체 르모니터의 보도에 따르면 라데팡스지구의 평균 공실률은 2019년 4%대에서 올해 초 20%를 넘어섰다. 이 매체는 라데팡스지구의 공실률이 파리 전체(3.5%), 프랑스 서부(13.6%)를 웃도는 수준이라고 알렸다. 프랑스 유력 경제일간지 레제코는 2월 28일 “라데팡스지구는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 활성화로 월·금요일에는 사람이 없다”며 “2024년까지 대형 빌딩 3개가 완공될 예정인 만큼 공실률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전했다.
2019년 매수 당시보다 크게 뛰어오른 현지 대출금리도 국내 증권사에는 부담인 것으로 지목됐다. 영국 부동산 중개 업체 프렌치프라이빗파이낸스에 따르면 프랑스의 20년 만기 부동산담보대출 금리는 2019년 1%대 중반에서 최근 최대 4%까지 올랐다. 유럽 중앙은행(ECB) 금리 역시 같은 기간 0%에서 3.5%로 상승했다.
업계에서는 한국투자증권의 경우 2019년 건물 인수 당시 5년 고정금리로 대출을 받은 만큼 내년부터 이자 부담이 늘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부분 7년 만기 고정금리로 대출을 받은 미래에셋증권도 2026년 만기일까지 3년을 남겨뒀다. 메리츠증권과 NH투자증권도 7년 만기 고정금리로 대출을 받았다. 업계에 따르면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과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도 이달 16일 프랑스로 출장을 떠나면서 라데팡스지구를 둘러볼 예정이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럽 전반의 경기 침체, 금리 상승에 따른 비용 상승 등으로 외부 환경이 많이 변했다”며 “공실 등으로 인한 현금 흐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개별 증권사들의 사후 대처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피스·상가 등 공실률이 10% 수준을 넘어선 것은 재고 적체의 위험이 크다는 의미”라며 “무리하게 투자에 나선 국내 증권사들은 물론 재투자에 나선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자칫 부실을 떠안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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