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항만공사들이 잇따라 국산 크레인 도입 방침을 세운 것은 중국산 크레인 과점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국내 항만 크레인 876기 중 54.6%(478기)는 중국산으로 집계됐다. 중국 크레인 업체들이 2000년대 초반 국내 시장에 진출한 후 빠른 속도로 점유율을 확대해온 결과다.
이 중 중국 국영기업인 상화이전화중공업(ZPMC) 제품만 427기로 두산에너빌리티·현대중공업 등 국내 기업이 생산한 크레인(389기)을 모두 합친 것보다 38기 더 많았다. 국내 최대 무역항인 부산항에 설치된 ZPMC 크레인은 298기로 전체 크레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5%가 넘었다. 주한 미군이 군수물자를 들여오는 평택·당진항에도 ZPMC 크레인 21기가 설치돼 있다. ZPMC는 빌 에바니나 전 미국 국가방첩안보센터(NCSC) 소장이 최근 “제2의 화웨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업체다.
다만 국내 항만공사들의 새 방침에 따라 중국산 크레인의 비중은 자연스럽게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부산항만공사는 향후 신축할 부두에 설치할 항만 크레인을 모두 국내 기업에 발주할 방침이다. 여수광양항만공사도 올 하반기 착공 예정인 광양항 자동화 항만에 들어갈 안벽크레인(QC) 11대와 트랜스퍼크레인(TC) 32대를 국내 업체를 통해 도입하기로 했다. 항만 업계 관계자는 “항만공사는 지난해부터 기타 공공기관으로 분류돼 국제입찰 의무 대상이 아니다”라며 “경쟁입찰 공고 시 국내 기업으로 입찰 참가 자격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산 크레인을 도입하면 부품 수급을 안정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부산항의 경우 2020년 크레인 붕괴 사고 당시 ZPMC 기술진 입국이 지연돼 복구 작업에 차질을 빚었다. 국내 기업이 항만 크레인을 공급하면 해외 부품과 기술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유지·보수 작업이 보다 원활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의 항만 기술 국산화 정책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해수부는 올 1월 스마트항만 기술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2031년까지 국내 기업의 글로벌 스마트항만 시장점유율을 1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다. 노후화된 항만 크레인 교체 수요가 국내 기업에 집중되면 매출 증대와 함께 연구개발(R&D) 투자도 늘어나 기술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해수부는 지난해부터 2031년까지 10년 동안 국내 항만 크레인 수요가 2조 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연내 기존 중국산 크레인에 대한 조치도 나온다. 정부는 현재 추진 중인 중국산 크레인 전수조사 결과에 따라 후속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미국에서는 중국산 크레인에 대한 보안 우려가 제기된 후 터미널운영시스템(TOS) 등 SW를 비롯해 크레인 자체를 교체한 사례도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산 크레인 퇴출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ZPMC 등 중국 크레인 업체가 탄탄한 내수 수요를 등에 업고 가격 경쟁력은 물론 기술 경쟁력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 기업은 2000년대부터 중국 굴기에 밀려 모터 등 크레인 주요 부품을 수입산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국산 크레인을 도입해도 정작 핵심 부품은 외산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중국의 반발 가능성도 문제다. 당초 중국 정부는 미국이 중국산 크레인을 잠재적 스파이 도구로 지목하자 “피해망상적 시도”라며 반발한 바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국에 반발할 빌미를 주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며 “하지만 전수조사를 통해 (중국산 크레인이)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입증되면 중국도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도 “미국이 최근 제정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는 자국 항만 장비에 보조금을 주는 조항도 담겼다”며 “항만공사에 국제입찰 의무가 없는 만큼 통상 규범상 문제될 사안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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