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무부가 예비판정을 통해 “한국 정부가 사실상 철강 업계에 보조금을 주고 있다”며 값싼 전기요금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3년 전만 해도 한국의 전기요금이 보조금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봤지만 이번에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한국전력이 생산 단가 급등에도 전기요금 인상에 나서지 못하면서 국내 산업용 전기요금은 ㎿h당 95.6달러(2021년 OECD·IEA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15.5달러의 82.7%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국내 전기요금이 지금처럼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자칫 양국간 통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올 2월 말 현대제철(004020) 후판에 0.5%의 상계관세를 물려야 한다는 내용의 예비판정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상계관세는 보조금 지급에 따른 자국 내 산업의 피해 사실이 확인되면 이에 상응하는 관세를 부과하는 일종의 무역보복 조치입니다.
지난해 9월 “정부가 값싼 전기료로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상계관세 같은 통상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던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언은 당시 가능성 낮은 하나의 시나리오일 뿐이었지만, 이번 예비판정 결과로 현실화된 셈입니다.
미 상무부는 “한국의 값싼 산업용 전기요금이 보조금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이 문제 삼은 것은 한국전력이 원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전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액화천연가스(LNG) 연료비 급등으로 지난해 한전의 전력 구입 단가는 2020년 대비 90.5% 올랐지만 판매 단가는 9.7% 증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지난해 한전은 전력을 ㎾h당 153.7원에 구매해 120.5원에 판매하면서 33.2원씩 밑졌습니다. 이렇게 누적된 영업적자는 지난해에만 32조 6034억 원에 달했고 올해도 전기료 조정이 없을 경우 한전의 누적 적자는 50조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미 상무부는 우리 정부가 압력을 행사해 전기료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 상무부는 “한국전력 자본의 51% 이상을 소유한 한국 정부는 한전의 업무와 운영에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한전의 운영으로 정부의 정책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한전의 전기요금 변경 신청을 승인하는 구조로 규제하는 상황에서 한국 내 전기료는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지만 산업용 전기요금은 오히려 싸진 것도 문제입니다. 국내 산업용 전기 판매 단가는 2020년 ㎾h당 107원에서 2021년 105원으로 낮아졌습니다. 반면 ㎾h당 전력도매가격(SMP)은 2020년 68.87원에서 2021년 94.34원, 지난해 196.65원으로 급등한 상태입니다.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서도 우리나라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낮은 수준입니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h당 95.6달러로 영국(187.9달러), 독일(185.9달러) 등 유럽 주요국의 절반에 그칩니다.
다만 이번 예비판정 결과는 최종판정에서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 미 상무부는 2019년 한국산 도금 강판에 반덤핑 판정을 내릴 때도 낮은 전기료를 문제 삼았지만 이후 최종판정에서는 “전기료가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산업부 관계자는 “그동안 미 상무부는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시장 원리에 부합해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려왔다”면서 “이번 최종판정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전기료가 지금처럼 원가 이하의 수준을 유지하면 지속적인 통상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습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다른 주요국 대비 싼 것은 사실”이라며 “최근 보조금 문제와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해결 절차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라 가급적이면 분쟁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이미 불거진 문제는 정부의 인플레이션 대응과 경기 침체 문제, 한미 관계 등의 논리로 설득해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로서는 전기료를 올리려니 경기 침체로 신음하는 기업이 고민입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전기료 인상을 더 늦추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지난해 한전·가스공사의 적자와 미수금에 대해 하루에 지급하는 이자가 매일 50억 원을 넘고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요금 인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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