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제약사 개발팀 15년차인 이팀장은 일주일 넘게 골머리를 썩고 있다. 제네릭(복제약)을 주로 취급하는 사업 구조상 위탁 생산하는 품목이 많은데 주거래처 중 한 곳인 다산제약의 아산 제1공장 화재로 공급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수탁사 1곳당 위탁 제네릭을 3개로 제한하는 개정 약사법 적용으로 매출 규모가 크지 않은 제약사들은 수탁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다보니 제조소 화재처럼 수탁사 문제로 공급에 문제가 생겨도 위탁사 입장에서는 거래처 변경이 쉽지 않다. 수탁사가 신규 계약에 앞서 ‘판매 가능 수량’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중소 업체들 사이에서는 “갑을이 뒤바뀌었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2021년 7월 개정된 약사법 영향으로 의약품 위수탁 규제가 강화되면서 의약품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특정 제약사가 여러 업체에서 동일 성분 제네릭 생산을 의뢰 받아 공급하는 위수탁 거래가 활발하다. 제네릭은 특허 기간이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신약)의 공개된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의약품이다. 오리지널약과 성분, 함량, 제형, 용법용량은 물론 모든 제조공정이 동일하다보니 제네릭 제품을 판매하려는 입장에서는 1개 업체가 시행한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 시험 자료를 이용해 허가를 받고 생산까지 일괄로 맡기는 게 효율적이다. 약사법 개정 전까지는 생동성 시험을 직접 시행하는 제약사의 의약품과 동일 시설에서 모든 공정을 동일하게 제조하는 경우 자료 사용횟수에 제한이 없었다. 생동성시험 자료 1건을 수백 여개 제약사가 공동 이용하면서 무더기로 허가를 받는 사례도 많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 같은 관행이 제네릭 난립의 주범이라고 보고 약사법 개정을 통해 동일 제조소, 제조방법 등을 가진 의약품의 경우 생동성 시험 자료 추가 이용횟수를 3회로 제한하는 규제를 내놨다. 생동성시험 1건당 제네릭 품목을 최대 4개까지만 허가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2018년 발사르탄 등 일부 고혈압 약물 성분에서 예기치 못한 발암 가능 물질이 검출되며 벌어진 대량 리콜 사태가 발단이 됐다.
문제는 기존에 위수탁 계약을 통해 허가를 받고 이미 판매 중인 제네릭 제품도 신규 규제의 영향권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개정 약사법은 기허가 위탁 제네릭에 대해 규제 시행 시점인 2021년 7월 이후부터 3개까지만 추가 생산이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수탁업체 입장에서는 위탁생산을 맡겼던 거래처가 중도 이탈하더라도 최대 3곳과 신규 계약이 가능하다.
반대로 위탁업체는 수탁사 사정으로 공급 일정이 바뀌어도 새 거래처를 찾기가 쉽지 않은 데다 수탁사 변경에 따른 행정처리에 2~3개월이 소요되는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늘었다. 공교롭게도 화일약품, 다산제약 등 최근 대형 화제가 발생한 제약사 2곳과 모두 거래 중이던 제약사들은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특히 다산제약에 위탁생산을 맡겼던 중소업체들이 대안을 찾지 못하면서 당장 이달부터 고혈압·고지혈증·전립선비대증 등 만성질환에 처방되는 다수 제네릭의약품이 품절 위기에 처했다.
연매출 500억 원 상당의 대형 당뇨병 약물의 특허만료에 맞춰 제네릭 발매를 준비하다 공급 문제로 사업 공백이 생긴 제약사들도 난감해 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심의 결과 급여 적적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환수협상을 위해 임상재평가를 요구했을 때도 위탁 제네릭을 판매하던 업체들은 자사의 의지와 무관하게 수탁사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수탁사가 심평원과 환수협상을 진행하는 대신 시장 철수를 선택할 경우 새로운 수탁사를 찾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다보니 시장을 포기하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미 허가받은 제품까지 위수탁 규제를 받는 건 지나치다며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품 자체의 문제가 없는데도 새로운 거래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의약품 공급에 차질을 빚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며 “기업의 신뢰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큼 기존에 허가받은 위탁제네릭에 대해서는 수탁사 변경 규제를 완화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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