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 어디에도 간호사 ‘단독 개원’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의사가 시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간호법 하나 생겼다고 단독 개원이 가능하겠습니까.”(간호 업계의 한 관계자)
“간호법이 제정되면 시행령 제정을 통해 간호사 단독 개원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시행령을 안 만들더라도 법 개정을 통한 간호사 단독 개원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대한의사협회의 한 관계자)
대한의사협회와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등 13개 보건의료 단체가 참여하는 보건복지의료연대가 예고한 총파업이 10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간호사와 의사 간 직역 갈등이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의료연대는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국무회의에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는지 지켜본 뒤 총파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판단이다.
의협과 대한간호협회는 간호법 제1조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에서 ‘지역사회’라는 문구를 놓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역사회로의 간호사 업무 영역 확대가 향후 간호사의 단독 개원 가능성을 열어두는 시발점이라는 게 의협의 주장이다.
의협이 간호사의 단독 개원 가능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고령화 현상과 맞물려 돌봄 시장이 급속히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65세 이상 진료비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2070년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만 65세 이상일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1년 기준 65세 이상 진료비는 41조 3829억 원으로 전체 진료비(95조 4376억 원)의 43.4%에 달한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의협과 간호협회의 힘겨루기는 결국 앞으로 돌봄 사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라며 “쉽게 말해 의사가 간호사를 고용하느냐, 간호사가 의사를 고용하느냐를 둘러싼 대결”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와 여당이 중재안을 내놓았음에도 간호협회가 간호법 입법을 양보하지 않는 데는 고착화돼 있는 의사와 간호사 간 위계 서열 구조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의료계의 분석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 의원은 “의료법 체계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간호사가 의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며 “간호법 제정을 통해 70년 동안 계속된 수직적 관계를 깨뜨리겠다는 속내인 것 같다”고 전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양측의 갈등 해결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간호사들이 총파업에 돌입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지금 예고된 의사 파업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법 또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간호사 단독 개원을 못하도록 못 박는 방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진료보조인력(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의 지위를 놓고도 충돌하고 있다. PA 간호사는 수술, 처치, 처방, 환자 동의서 작성 등 전공의와 유사한 업무 일부를 수행하는 인력이다. 미국은 면허를 신설해 PA 간호사 제도를 합법화했지만 우리나라는 PA 간호사 면허가 따로 없다. 의사 단체는 현행법상 PA 간호사가 수술·시술 행위를 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인 만큼 적발 시 고소·고발 등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간호사단체는 PA 간호사 업무는 간호사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윗선이 지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 관계자는 “PA 간호사 업무를 합법화하든지, 아니면 의사 인력을 늘리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간호사와 의사 간 갈등 고조에는 정부와 국회가 각 직역의 업무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탓도 크다고 강조한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보건의료 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의사의 업무에 보다 전문적인 분야가 추가됐으면 간호사의 업무도 조금 더 전문화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했다”며 “보건의료기본법에 그런 내용을 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직역 간 갈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직무 정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통령은 법안을 국회로부터 이송받은 날로부터 15일 이내에 공포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간호법은 4일 정부로 이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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