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겠습니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5월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정승일 한국전력 사장이 전력그룹사 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출자 지분 매각, 부동산 매각, 해외 사업 구조 조정, 긴축 경영 등을 통해 6조 원 규모의 재무 개선을 추진하겠다”며 이같이 발표했다. 옛 의정부 변전소 부지 등 한전 보유의 부동산 15곳과 전력그룹사가 보유한 부동산 10곳을 즉시 매각하고 사용 중인 부동산은 대체 시설 확보 등 제약 요인 해소 후 추가 매각을 추진하기로 했다. ‘매각 가능한 모든 부동산을 매각한다’는 게 대원칙이었다.
그러나 정작 회의 장소였던 한전아트센터는 매각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당장 핵심이 빠져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지 면적 2만 6300㎡에 들어선 17층짜리 복합 문화 시설(연면적 7만 9403㎡)을 통매각할 경우 조 단위의 재무 개선 효과가 기대됐지만 지역 주민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하다는 이유였다. 한전아트센터는 삼성동 본사가 나주로 이전한 뒤 한전의 실질적인 서울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협력사 직원 감전 사고 방지 종합 대책 발표도, 같은 해 6월 임원진 성과급 전액 반납 발표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여의도 노른자위에 위치한 9층 독립사옥 남서울지역본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한전법 개정안이 부결됐을 때 긴급 회의가 국회의사당에서 2㎞ 떨어진 남서울본부에서 소집됐다. 핵심 시설로 분류된 남서울본부는 매물 목록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한전이 재정 건전화 계획을 당초 6조 원에서 20조 원으로 확대할 때도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권이 전기요금 인상의 조건으로 보다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주문하면서 이들 알짜 부동산의 분할 매각, 임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꺼내고 있다. 한전의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보면 전남 나주 본사를 비롯한 토지와 건물 면적은 각각 2027만 6438㎡와 420만 7258㎡에 달한다. 지난해 말 기준 장부가액은 각각 6조 1709억 원, 2조 4552억 원이다. 5년 전(토지 1960만 8985㎡, 건물 379만 7466㎡)과 비교해 토지는 66만 7453㎡, 건물은 40만 9792㎡ 증가했다. 더군다나 전국에 한전 건물이 깔고 앉아 있는 땅 가운데 금싸라기 땅이 적지 않다. 한전은 내년에 토지 등의 자산 재평가를 통해 7조 원 규모의 재무 개선 효과를 노리겠다는 방침이다.
한전아트센터와 남서울본부 외에도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백화점에서 한 블록 건너인 한전 부산울산본부,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에 둘러싸여 있는 한전 강동송파지사, 더블 역세권인 사당역과 지척인 한전 관악동작지사 등이 개발 가치가 높은 편이다. 도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서울 노원구 공릉 한전 인재개발원도 잠재력이 큰 곳으로 평가받는다. 한전 인재개발원을 나주 혁신도시로 내려보내고 그 빈자리는 개발하자는 지역 정가의 주장에 한전도 다소 전향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한전은 2014년 현대차에 10조 원이 넘는 거액으로 서울 삼성동 본사 부지를 매각해 쌓여 있던 빚을 갚은 선례가 있다. 최근에도 경기북부본부 변전소 잔여 부지를 입찰 최저가(1280억 원)의 2배가 넘는 2945억 7000만 원에 대우건설에 매각했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등 자산 매각은 한전이 전기를 원가 이하로 밑지고 파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한전은 올 1~2월 ㎾h당 165.6원에 전기를 사서 149.7원에 팔았다. 1㎾h당 15.9원꼴의 손실을 봤다. 지난해 연간 32조 원이 넘는 적자를 낸 데 이어 올 상반기에도 8조 원 남짓의 적자를 전망하는 이유다.
유재선 하나증권 연구원은 “㎾h당 10원 안팎의 전기요금 인상도 도전적인 과제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라며 “3분기 이후 계통한계가격(SMP)이 140원/㎾h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가정하에서 연내 사채 발행 한도 추가 상향이 요구되지 않는 요금 인상 폭은 20원/㎾h”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h당 20원 인상으로 연간 11조 원의 이익이 개선된다”며 “2024년부터는 외부 자금 조달이 필요하지 않은 건전한 재무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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