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와 관련해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별도 기준’을 검토하는 것은 미국의 중국 제재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혼선을 줄 수 있다는 우리 정부의 논리를 상당 부분 수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한미 양국이 최근 정상회담 등을 통해 부쩍 밀착하면서 ‘동맹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구체화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다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이 검토하는 별도 기준에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9일(현지 시간)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한국과 대만 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문제가 발생해 공급망 교란이 생기는 것은 미국도 원치 않는 시나리오”라면서 “지금처럼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1년 유예 방식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시스템과 기준을 만드는 방안을 미 상무부와 지속적으로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상당량의 생산을 중국 공장에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중국 시안 공장에서 전체 낸드의 41%를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 공장에서 전체 D램의 48%를 제조하고 있다.
중국 공장에 장비 반입이 제한돼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연쇄적인 파장을 초래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장비 반입 등 중국 공장 내 투자를 아예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공장 자체가 중국에 넘어가면서 핵심 기술을 고스란히 뺏기는 상황이 연출될 우려도 있다.
이와 관련해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과의 회담에서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내 한국 반도체 생산 시설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해 중국 내 우리 기업의 안정적 운영을 보장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우리 정부의 요청대로 별도 기준이 만들어질 경우 한국 기업은 한시적으로 수출 통제 유예를 적용 받는 대신에 기간 제한 없이 기준 내에서 미국의 반도체 장비를 반입해 중국 내 생산 설비를 업그레이드하고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앞서 반도체지원법 대중국 가드레일(안전장치)에서 중국 공장의 생산 능력 확장은 제한했으나 기술적 업그레이드는 제한하지 않았다”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국 공장에 대한 별도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이의 연장선 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상무부가 검토하는 별도 기준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미국이 정한 ‘중국 반도체 상한선’보다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0월 미국은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핀펫 또는 가펫 등 비평면 트랜지스터 구조의 16나노 로직 반도체 △14나노 이하 로직 반도체 기술 및 생산 장비 등에 대한 수출 통제를 단행했다. 이 가운데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와 18나노 이하 D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주력 품목이기도 하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별도 기준을 마련한다면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과정에서 적용한 것보다는 높은 사양의 반도체를 중국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겠느냐”면서도 “다만 무한정 허용하지는 않고 새로운 한도를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앨런 에스테베스 미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은 2월 한 포럼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수준에 한도(cap on level)를 둘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이 이처럼 우리 정부와 기업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새로운 기준에는 다양한 조건이 붙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해도 관련 기술이나 장비가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엄중한 안전장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마련하려는 별도 기준이 장기적으로 우리 기업들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 따져봐야 한다”면서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유예 조치의 종료 시한인 10월까지 시간이 남아 있고 그 안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정부 차원에서 검토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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