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일본에 반도체 연구개발(R&D) 거점을 설치한다. 일본 유력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회사와의 근거리 협력으로 R&D 시간을 단축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14일 닛케이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일본 요코하마시에 첨단 반도체 시제품 생산 라인을 신설하기 위해 300억 엔(약 3000억 원)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2025년 가동이 목표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3월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반도체(DS) 부문 연구 시설을 본진인 요코하마 연구소로 결집해 디바이스솔루션리서치재팬(DSRJ)을 설립했다. 기존 라인을 확장하는 방향과 신규 부지에 새로운 설비를 세우는 계획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놓고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R&D 라인 건설을 위한 보조금을 일본 정부에 신청해 허가받으면 100억 엔(약 1000억 원) 이상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의 투자와 일본의 보조금 지급은 최근 조성된 한일 정부 간 화해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2019년 일본 정부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트집 잡아 한국을 상대로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 등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을 규제했다. 그러나 올해 3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일본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이 수출 규제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이달 7일 서울에서 2차 한일정상회담을 가진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국내 반도체 제조사와 일본 소부장 기업 공조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삼성전자는 다만 “일본 신규 연구소 설립은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고 설명했다.
강력한 현지 소부장 인프라 매력적…TSMC도 투자했다
삼성전자가 일본에서 R&D 라인에 투자하는 것은 현지에 안정적인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계 4대 반도체 장비 회사인 도쿄일렉트론(TEL), 세계 웨이퍼 시장에서 50% 이상 점유율을 차지한 신에츠와 섬코, EUV용 블랭크 마스크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호야 등 기술 경쟁력과 자본을 겸비하고 있다. 원천·요소 기술에 강한 중소기업들도 일본 각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반도체 장비 공급 부족 현상이 극심했을 때도 현지 공급망은 전혀 문제가 없었을 정도로 일본 인프라는 탄탄하다”며 “삼성전자도 일본의 장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이들과 지근거리에서 협력해 반도체 개발 속도를 앞당기겠다는 계산을 깔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수출 규제 사태 이후 한국 거점 조성이 활발한 일본 업체들과의 국내 협력은 물론 본진이 있는 일본에서도 R&D를 진행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기술 ‘초격차’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삼성전자처럼 해외 반도체 제조사들도 일본 R&D 기지 설립을 꾀하고 있다.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라이벌 TSMC는 지난해에 일본 쓰쿠바시에 후공정 R&D 센터를 개소해 일본 업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TSMC는 이와 함께 구마모토에 새로운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설립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TSMC 공장 건설 비용의 절반인 4조 6000억 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한편 미중의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도체는 글로벌 경제 안보상 전략물자로 등극했다. 중국은 반도체 자체 개발에 박차를 가해왔지만 지난해 10월 미국이 고성능 반도체 장비 수출을 차단하면서 생성형 인공지능(AI)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 국가들은 중국을 포함하지 않는 반도체 공급망 마련도 서두르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