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충남 계룡시의 에이치투 공장. 공식적인 공장 준공식은 이튿날로 예정돼 있었지만 직원들은 작은 컨테이너 크기의 바나듐레독스플로배터리(VRFB)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조립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에이치투는 독일·폴란드·베트남 등 6개국에서 상업용 VRFB ESS 설치를 마쳤으며(총 31㎿h 규모) 내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20㎿ 규모의 ESS 발전소 상업 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미국 내 VRFB ESS 발전소 중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이번에 연간 330㎿h 규모의 계룡 공장이 준공되면서 글로벌 3위권 수준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
VRFB는 바나듐을 원료로 한 배터리셀에 전해액 탱크를 연결, 전기를 저장하는 흐름전지(플로배터리)다. 저장해둔 전기는 최소 4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 이상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조량이 많은 낮 시간대 태양광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해가 진 뒤 이튿날 아침까지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극 부분에 적은 용량의 전기만 저장할 수 있는 기존 리튬이온배터리(LiB) ESS의 한계를 극복한 셈이다.
앞서 국내에서 LiB가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등 잇따른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됐으나 VRFB는 물 성분의 전해액을 사용하기 때문에 화재 위험이 없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더 많은 전기를 저장하려면 전해액의 용량만 늘리면 된다. 한신 에이치투 대표는 “LiB는 에너지 밀도가 높고 작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자동차용으로 적합하다”면서 “반면 VRFB ESS는 에너지 밀도가 낮지만 용량을 무제한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LiB가 승용차라면 VRFB는 트럭인 셈이다.
한 대표는 ‘VRFB 파워플랜트’라는 용어를 내놓을 만큼 발전소 ESS 시장 선점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수명이 기존 LiB ESS의 두 배인 20년 이상이라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수명이 다해도 VRFB ESS 원가의 최대 50%를 차지하는 전해액은 그대로 둔 채 배터리셀만 교체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한 번 지으면 수십 년 이상 운영되는 발전소에서 VRFB ESS의 등장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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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가 만든 VRFB ESS는 국산화율이 100%에 육박한다. 한 대표는 “배터리 종류는 수백 가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 밸류체인이 갖춰진 배터리 기술은 VRFB와 LiB뿐”이라고 강조했다. 2010년 창업 당시 미래 시장을 내다보고 아이템을 선점한 덕분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도 VRFB 기술을 상용화한 기업은 일본 스미토모일렉트릭, 오스트리아 셀큐브, 영국 인비니티 등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며 국내에서는 에이치투가 최초라는 게 한 대표의 설명이다.
차세대 ESS는 전 세계 주요국의 정책 지원에 힘입어 최근 몇 년 새 급속도로 도입되면서 각종 전력난 해소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미국 캘리포니아는 최근 수년간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높이는 동시에 노후한 천연가스 발전소를 잇따라 폐쇄했다. 그러나 일조량·풍량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변동할 수밖에 없는 신재생에너지의 한계로 2020년 8월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를 맞이했고 급기야 전력 공급 중단 조치(순환정전)까지 실시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4월부터 강제로 태양광 발전을 중지하는 출력 제어 조치가 시행 중이다. 수요보다 많은 전기가 생산되면 송배전망에 장애를 일으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부족해서 혹은 반대로 넘쳐서 발생하는 문제를 차세대 ESS가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 대표는 “VRFB ESS는 화석연료 발전과 신재생에너지 출력 제어를 모두 줄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솔루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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