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으면 뭐하나요. 저희들의 현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대법원의 판결 소식을 접한 전문직 서비스 플랫폼 업체 관계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랬다. 4년 만에 나온 법원의 최종 판결을 계기로 전문직과 갈등을 겪고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국회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기업인은 찾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인 여선웅 직방 전 부사장이 “더불어민주당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기득권의 눈치를 보느라 혁신 앞에 눈을 감았다”고 비판한 것을 제외하면 정치권에서 공개적으로 반성의 목소리를 낸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
벤처·스타트업 관계자들은 국내에 혁신 스타트업이 탄생하려면 국회의원들의 태도 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직역단체의 눈치를 보지 말고 소비자 효용을 우선 고려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국회에는 의료·법률·세무 등 전문직 서비스 플랫폼의 애로를 해소하기 위한 법안이 사회적 논의를 거쳐 발의돼 있다. 하지만 상임위원회 내에서 관련 논의는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세무법인 삼쩜삼은 현행법에 주민등록번호 수집 근거가 없어 불법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김한규 민주당 의원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자 본인 동의를 받으면 스타트업도 주민등록번호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한국세무사회가 정무위에 공식 반대 의견을 최근 제출하면서 법안 논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미용의료 플랫폼 ‘강남언니’ 등의 입장을 고려해 마련된 의료법 개정안도 처지는 비슷하다. 이 법안은 인터넷 매체 의료광고 심의를 대한의사협회 등으로 구성된 기구에서 받도록 한 기존 법안에 보건복지부의 관리 감독 내용을 추가했다. 직역단체의 자의적 기준에 따른 심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스타트업들이 기존 관행을 깨고 소비자 편의를 높이기 위해 도전하고 있는 혁신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확고하다. 올 3월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스타트업얼라이언스 등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3.6%는 ‘전문 직역 권익 보호보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특히 법률·세무 서비스 플랫폼의 경우 직역단체 주장에 대한 부정 의견이 높았다. 변호사 단체의 ‘변호사의 공익성 보호를 위해 플랫폼 서비스가 금지돼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61.4%에 달했다. 세무사 단체의 ‘세무사가 아닌 자가 환급 등 세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전문 직역 침해다’라는 입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56.6%였다.
과거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이 자체 실시한 설문조사에도 응답자의 76.4%는 접근성과 투명성 개선 등을 이유로 ‘법률 서비스에 정보기술(IT) 도입이 필요하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 여론에 민감해야 할 정치권에는 이런 여론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국민 대다수의 목소리보다 직역단체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일 수도 있다. 특정하기 어려운 여론보다 확실한 직역단체 소속 표를 단속하는 것이 국회의원 일자리 유지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니콘팜 소속의 한 관계자는 “총선이 1년도 안 남은 시점에서 조직력을 갖춘 직역단체에 의원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면서 “법안 논의에 조용히 찬성 표를 던지는 것조차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로톡 문제는) 아직 법무부 최종 판단도 나오지 않았고 여당 내에서 로톡 관련 대통령실 입장이 공유된 것이 없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선뜻 입법 논의에 동참하기 부담스럽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결국 대다수 국민의 편익 향상과 혁신 기업의 성장보다 똘똘 뭉쳐 한목소리를 내는 직역단체의 ‘여론’을 더 무서워하는 게 현재 정치권의 수준인 것이다.
정치권이 각자의 사정을 들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관련 분야 스타트업은 줄줄이 폐업할 위기에 놓였다. 대표적으로 비대면 진료 전문 기업인 쓰리제이는 내부적으로 비대면 진료 ‘피벗(사업 전환)’을 검토하고 있다. 쓰리제이가 서비스하는 앳홈테스트는 미국에서 이미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인 유니콘 기업을 배출하는 등 성장 잠재력이 큰 분야로 꼽힌다. 비대면 진료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여야가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고 강조했지만 법제화 대신 시범사업 형태의 어중간한 결론에 합의를 했다”며 “같은 의사한테만 비대면 진료를 받도록 하는 등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책만 내놓으면서 비대면 진료 생태계는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혁신적인 모빌리티 서비스로 꼽혔던 ‘타다’가 택시기사들의 생계를 위한다며 나선 정치권의 공격에 좌초된 지 4년이 지났다. 하지만 현재 비대면 진료, 회계 플랫폼, 법률 서비스 플랫폼 등의 상황을 보면 정치권은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변화가 없다. 규제에 꽉 막혀 혁신하기 어려운 국내를 떠나 아예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도 늘고 있다. 국민 여론을 반영하고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역할이 정치다. 하지만 정치권은 4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표 계산에만 골몰하고 있다. 정치권이 반성하고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제2의 타다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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