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에 대해 국민들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지만 사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국가전략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국가 총력전까지 선포한 것은 우리 경제를 든든히 뒷받침해주던 반도체의 수출 부진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월별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8월(-7.8%)부터 지난달(-36.2%)까지 10개월 연속 전년 동기 대비 감소하는 등 깊은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윤 대통령은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의 모두발언에서 ‘전쟁’을 4번 언급하며 위기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혁신과 전략의 조화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민간의 혁신과 정부의 선도적 전략이 동시에 필요하다”며 “기업 투자, 유능한 인재들이 다 모이도록 정부가 제도 설계를 잘하고 인프라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짚었다.
이와 관련해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 방향을 재설정했다. △초격차 기술 확보 △투자 환경 조성 △산업 생태계 조성 △국제 협력, 인력 양성 등이 큰 축이다. 구체적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PIM(Processing in Memory) 연구개발(2022~2028년, 4000억 원)과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사업(2020~2029년, 1조 96억 원) 외에 전력반도체, 차량용 반도체, 첨단 패키징 등 파괴적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유망 반도체 기술까지 연구개발을 확대한다고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약 1조 4000억 원 규모의 예비타당성조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전력반도체는 신속한 전력 변환과 제어에 특화된 반도체다. 발전소 등 대규모 전력 시스템, 태양광 발전 인버터 등 재생에너지 시스템, 전기차, 산업 자동화 등에 쓰이는데 세계적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역시 전기차의 급속한 성장세와 맞물려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자동차 산업 공급망 병목현상을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정부는 매력적인 투자 환경과 산업 생태계를 가꾸는 데도 전력투구하기로 했다. 투자 세액공제율 상향(8→15%)과 인허가 타임아웃제, 반도체 생산 시설 용적률 완화 특례 도입 등에 더해 올해 5000억 원을 시작으로 2027년까지 총 2조 8000억 원의 정책금융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팹리스(반도체 설계) 투자 활성화를 위한 30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펀드도 올 하반기 선보인다.
메모리 중심의 반도체 밸류체인(가치 사슬)을 시스템반도체로 확장하기 위해 국내 팹리스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간 협력 강화 방안을 적극 모색한다. 그 일환으로 삼성전자 등 국내 파운드리 기업들과 협의해 팹리스의 시제품 제작 지원(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MPW는 웨이퍼 한 장에 다양한 종류의 반도체를 찍어 만드는 것을 뜻한다. 팹리스는 신제품 출시 전에 파운드리사의 생산 라인에서 시제품을 만드는 MPW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파운드리 업체의 수주가 많을 때는 MPW 기회를 배정받기 어려울 수 있다.
한국형 IMEC인 ‘첨단반도체기술센터(ASTC)’도 민관 합동으로 구축한다. ASTC는 설립 이후 반도체 중장기 제품·기술 로드맵 마련, 소자 기업과 소부장 기업의 공정·제품 기술 개발 및 성능 평가 지원,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 등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설립 단계부터 미국 측과 국제 협력도 강화한다.
윤 대통령은 “최근 지정학적 이슈가 기업들의 가장 큰 경영 리스크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기업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긴밀한 소통을 통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첨단산업 경쟁력은 우리 경제를 지키는 버팀목이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의 근원”이라며 반도체 국가 전략의 필요성을 재차 언급했다. 특히 이날 참석한 김주현 금융위원장을 향해 “오늘 이 자리에 금융위원장을 왜 초청했겠느냐”며 “첨단 디지털 기업의 상장을 빠르게 해서 자금이 잘 돌게 금융 지원 제도를 잘 설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전 세계의 반도체 경쟁이 워낙 치열해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제2의 도약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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