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005380)그룹이 해외 자회사의 소득을 국내로 들여오는 ‘자본 리쇼어링’으로 7조 8000억 원을 마련해 국내 전기차 투자를 확대한다. 경영 실적 호조로 유동성이 풍부한 해외 법인의 자금을 활용해 울산·화성·광명 등 전기차 생산 시설 전환 투자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연구개발본부장인 김용화 부사장을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으로 임명하며 연구개발(R&D) 조직도 대규모로 개편했다.
현대차그룹은 주요 계열사 해외 법인의 올해 본사 배당액을 직전 연도 대비 4.6배 늘려 국내로 59억 달러(약 7조 8000억 원)를 들여와 이를 국내 전기차 투자 재원으로 사용한다고 12일 밝혔다.
세부적으로는 현대차가 해외 법인으로부터 21억 달러(약 2조 8100억 원)를 국내로 들여오고 기아(000270)는 33억 달러(약 4조 4300억 원), 현대모비스(250060) 2억 달러(약 2500억 원) 등이다. 전체 배당금의 79%는 상반기 내 본사로 송금돼 국내 전기차 분야 투자 등에 본격적으로 집행된다. 나머지 21%도 올해 안으로 국내로 유입된다.
현대차그룹은 자본 리쇼어링으로 마련한 자금을 울산과 광명의 전기차 전용 공장, 기아 화성 전기차 공장 신설 등에 주로 투입할 계획이다. 해외 법인의 배당금은 차세대 전기차 전용 플랫폼 개발 및 제품 라인업 확대, 핵심 부품 및 선행 기술 개발, 연구 시설 구축 등 연구개발(R&D) 투자에도 활용된다.
현대차그룹은 해외 유보금을 대거 들여올 수 있는 배경으로 올해부터 시행된 법인세법 개정을 꼽았다. 지난해까지는 해외 자회사의 잉여금이 국내로 배당되면 해외와 국내에서 모두 과세된 뒤 일정 한도 내에서만 외국 납부세액이 공제됐다. 하지만 올해부터 해외에서 먼저 과세된 배당금은 국내에서 5% 미만으로 과세되고 나머지 95%는 공제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법인세 개정으로 국내로 배당할 수 있는 환경이 용이해졌다”면서 “국내 차입을 줄일 수 있어 재무구조도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자본 리쇼어링으로 자금 운용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그룹은 북미 전기차 시장 선점을 위해 전기차 신공장과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 등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데 별도의 차입 없이 8조 원에 가까운 국내 투자 재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이 북미 시장 공략을 위해 밝힌 투자 규모는 지금까지 148억 4000만 달러(약 20조 원)에 이른다. 미국 전기차 시장 공략의 전진 기지가 될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HMGMA) 건설에 55억 4000만 달러(약 7조1400억 원)를 투입하고 전기차 공장 인근에 LG에너지솔루션·SK온 등과 합작해 짓는 배터리 공장 2곳에도 총 93억 달러(약 12조 원)를 투자해야 한다. 기존의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과 기아 조지아 공장의 생산라인을 전기차로 전환하는 데도 추가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국내 상황도 비슷하다. 최근 세제 당국이 전기차 공장 투자에도 최대 30%의 세액공제 혜택을 줬지만 국내 전기차 인프라 확대의 상당 부분은 현대차그룹이 책임져야 하는 실정이다. 르노코리아와 제너럴모터스(GM), KG모빌리티 등 국내에 생산 공장을 보유한 완성차 업체들의 경우 내연기관 차량의 판매를 유지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쓸 곳이 많다 보니 그룹의 곳간도 크게 불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 등 주요 계열사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2021년 28조 4853억 원에서 지난해 36조 5071억 원으로 28.1% 늘었지만 올해는 3월 말 기준 41조 7320억 원으로 전 분기 대비 14.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 리쇼어링으로 마련한 투자 재원은 그룹에 ‘가뭄의 단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해외 전기차 공장 투자와 비교해 국내 전기차 생산 시설 투자 집행에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 여론을 잠재우는 효과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