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어려운 경기 상황 속에서도 내년 긴축재정 기조를 유지하기로 했다. 국가채무가 더 이상 늘어나면 국가의 재정 건전성마저 훼손될 수 있다는 절박감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윤석열 대통령은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며 “지난 정부에서만 나랏빚이 400조 원 증가했다. 70년간 600조 원이던 국가채무가 1000조 원을 넘어섰다”며 “일각에서는 여전히 재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빚을 내서라도 현금성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미래 세대 약탈이고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를 노린 선심성 예산 요구가 정치권에서 쏟아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도 담겼다. 윤 대통령은 “말도 안 되는 정치 보조금은 없애고, 경제 보조금은 살리고, 사회 보조금은 효율화·합리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올해 예산 심사가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나, 정부와 함께 적극 대응할 것"이라 말했고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과 그리스 미초타키스 총리의 총선 승리를 언급하며 우리의 건전재정도 매우 중요한 어젠다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우리 재정에 만연한 관행적·선심성 지출과 재정 누수 등에 대한 전면 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 각 부처의 모든 예산 사업을 제로베이스에서 심사한 후 국익과 국민 삶에 보탬이 되는 사업은 적극 지원하되 그 외 사업은 과감하게 구조 조정하는 식이다.
우선 부정 수급이 여러 차례 드러난 노동조합·사회적기업·시민단체 보조금부터 대폭 칼질한다. 내년 총선을 노린 선심성 예산도 주요 타깃이다. 윤 대통령은 “노조·비영리단체 등에 지원되는 정치적 성격의 보조금, 효과 분석 없이 추진된 예산은 제로베이스에서 재점검해야 한다”며 “표를 의식하는 매표 복지 예산은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에 “회계투명성 없는 노조는 지원을 원천제외하고 사회적 기업 역시 인건비 같은 직접지원은 최소화겠다”고 답했다.
이렇게 아낀 예산은 저출산 대응, 지역 균형 발전, 연구개발(R&D) 투자, 약자 복지 강화에 투입한다. 군 초급 간부 복무 여건 개선과 국가유공자 참전수당을 적극 확대하고 다문화가정·은둔형 고립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한 사회서비스도 촘촘히 지원한다. 국내 중심의 폐쇄적인 연구 생태계를 개선하기 위해 세계 석학 및 글로벌 우수 연구소 등과의 공동 연구를 활성화하고 온정주의, 나눠 먹기 방식에 치우친 R&D 관행도 혁신한다. 윤 대통령은 “단순히 지출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는 제대로 써야 한다”며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강화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하는 데는 더 과감하고 효과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역 활성화와 관련해서는 단순 재정 투입 대신 민간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방안이 거론된다. 윤 대통령은 “프랑스 순방 때 ‘스테이션 F’를 갔는데 젊은 청년들이 모여서 책상 하나에서 창업을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지방소멸지역에 스타트업 쉐어하우스 타운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게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에, 이영 중기부 장관은 “획기적인 사업 하나를 내년에 만들겠다"고 답했다. 이 외 국격에 걸맞은 전략적 공적개발원조(ODA)도 이어간다.
문제는 내년 총지출 증가율의 방향성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올해 40조 원의 ‘세수 펑크’가 예상되는 데다 내년 세입 역시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총지출 증가율을 ‘마이너스’로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정부는 올해 예산을 편성할 때 총지출 규모를 639조 원으로 잡아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축소했다.
하지만 올해 실질적 나라 살림인 관리재정수지는 그 전과 다를 바 없는 100조 원대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예산 통과 과정에서 잡았던 관리재정수지는 58조 2000억 원 적자였는데 수입인 세금이 예상보다 40억 원 덜 들어오게 생겼기 때문이다.
올해 1~4월 국세 수입은 134조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3조 9000억 원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연말까지 지난해 수준으로 세금이 걷힌다고 해도 올해 세수는 362조 원으로 정부 예상(400조 5000억 원)보다 38조 5000억 원 부족하다. 관리재정수지는 2020년 이후 3년 연속으로 100조 원 수준의 적자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국가채무도 매년 100조 원씩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긴축 기조가 반영되려면 내년도 총지출을 올해보다 더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올해 상반기 기업 실적이 좋지 않은 만큼 세수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법인세 수입은 올해보다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내년 총지출 증가율이 플러스가 된다면 정부가 약속했던 건전재정 기조는 식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논의된 내용은 내년도 예산안과 2023~2027 국가재정운용계획에도 적극 반영된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내년도 예산편성 과정에서는 원칙을 바로 세우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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