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IPO) 시장 침체로 상장 시기를 늦춘 스타트업들의 지분이 대거 시장에 풀리면서 이들의 구주에 투자하는 전략이 벤처투자 업계 전체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 중소형 벤처캐피털(VC)뿐만 아니라 대형 VC까지 저가 매수 기회를 노리고 신규 세컨더리 펀드(구주 투자 전문 펀드)를 결성하면서 시장을 급속히 불리는 분위기다.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형 VC인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최근 약 300억 원 규모의 ‘에스브이에이 세컨더리 투자조합 1호’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세컨더리 펀드 결성에 나선 것은 2000년 회사 설립 이후 처음이다. 이 VC는 이달 펀드 결성을 목표로 금융회사 등 잠재 출자자들을 대상으로 막바지 자금 모집 작업이 나서고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세컨더리 펀드 결성에 뛰어든 건 벤처투자 시장에 유동성이 줄어든 상황에서 우량 스타트업의 구주를 저가에 매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세컨더리 펀드란 투자 대상 회사가 새로 발행한 신주가 아니라 기존 주주나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던 구주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펀드를 말한다. 통상 신주에는 동반매각권, 이사회 참여권 등이 부여되지만 구주에는 이 같은 권한이 거의 없다. 대신 구주 가격에는 신주 발행가보다 10~30% 싼 할인율이 적용된다.
에스브이에이 세컨더리 투자조합 1호는 최지현 이사가 대표 펀드매니저를 맡아 결성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주요 투자 대상은 상장을 2~3년 정도 앞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다. 특히 시장 상황 악화로 최근 기업가치가 급격히 하락한 곳을 중점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다.
세컨더리 펀드 결성에 팔을 걷어붙인 VC는 이뿐이 아니다. DSC인베스트먼트(241520)도 오는 9월까지 약 1000억 원 규모의 ‘DSC 세컨더리 패키지인수펀드 제1호’ 결성을 추진 중이다. 전체 운용자산이 1조 원에 달하는 DSC는 그간 구주 투자보다는 신주 투자에 주력했던 VC다. 두나무 등 특정 기업의 구주를 인수할 목적으로 세컨더리 펀드를 결성한 적은 있어도 투자 대상을 정하지 않은 블라인드 펀드를 추진하는 건 처음이다.
한국투자증권 IPO팀 출신으로 세컨더리 펀드 운용에 전문성을 갖춘 이성훈 이사가 대표 펀드매니저를 맡았다. DSC 관계자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벤처 펀드의 구주 매각 물량이 계속해서 늘 것으로 보고 세컨더리 펀드 결성을 결정했다”며 “우량 스타트업의 구주를 저가에 매수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K2인베스트먼트도 최근 KDB캐피탈과 손잡고 약 500억 원 규모의 ‘KDBC-K2세컨더리펀드’ 결성 작업에 착수했다. 김상우 부사장이 대표 펀드매니저를 맡는다. K2인베스트먼트는 늦어도 7~8월에는 펀드 결성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이다. KDB캐피탈이 대규모 출자를 약정하면서 출자자 모집도 순항하고 있다. 향후 2~3년 내 상장이 상장 가능성이 높고 유망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이 주요 투자 대상이다.
K2인베스트먼트는 세컨더리펀드 운용에 전문성이 높은 VC로 분류된다. 2011년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세컨더리 펀드를 결성·운용해 왔다. ‘신한-K2 세컨더리 투자조합’ ‘K2 유동화 전문 투자조합’ 등을 성공적으로 청산한 경험도 있다. 현재는 ‘K2-KIS 2021 세컨더리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LB인베스트먼트(309960), 신한벤처투자 역시 이미 구주 인수 비중이 높은 벤처펀드를 결성해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세컨더리펀드를 운용하는 VC들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스타트업으로는 클로버추얼패션, 이노스페이스, 트릿지, 몰로코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유니콘 기업 도약을 앞두고 있거나 2~3년 내 상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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