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회를 열고 2분기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전격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전력과 가스공사의 고통 분담이 전제된 자구책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여당 주장에 밀려 요금 인상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그로부터 40일이 흐른 5월 10일 정부 여당이 당정협의를 거쳐 요금 조정안을 발표할 것으로 예고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후 들어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또 발표가 연기됐다. 결국 이틀 뒤 정승일 한전 사장의 사퇴와 25조 원 이상의 재무 구조 개선안이 나오고 나서야 15일 당정은 가까스로 2분기 요금 인상안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전기요금 결정 시스템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현행 전기요금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한전이 조정안을 작성해 산업통상자원부에 신청하면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산업부 장관이 최종 인가하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다만 산업부는 물가안정법에 따라 요금 결정에 앞서 물가 당국인 기획재정부와도 협의하도록 돼 있다. 이렇다 보니 기재부가 물가 안정을 이유로 요금 인상에 언제든 제동을 걸 수 있는 구조다.
문제는 기재부 입김에 더해 정치권 개입까지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2분기 요금 인상 결정 과정에서 드러났듯 여당은 국민 여론을 내세워 번번이 어깃장을 놓기에 바빴다.
전문가들은 요금 결정이 외풍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를 별도의 독립기구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준금리를 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전기위원회도 원가주의에 기반해 독립적으로 요금을 결정하도록 만들자는 구상이다. 미국(공익사업위원회)과 영국(가스전력시장위원회), 일본(전력가스시장감독위원회) 등 선진국들은 이미 독립기구에서 요금을 결정하고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장은 “법적으로도 아무 권한이 없는 여당이 요금 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며 “전기위원회를 금통위나 방송통신위원회처럼 실질적 권한을 갖고 독립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 역시 인수위원회 시절 전기위원회를 독립기구로 분리하는 방안을 국정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맞춰 산업부가 전기위원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발주한 연구용역 결과가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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