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촬영) 사진도 깨끗하고 혈액검사도 문제 없습니다. 다음 달이면 수술하신지도 어느덧 만 5년이네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유, 교수님 덕분이죠. 알려주신 대로 식단을 바꾸고 꾸준히 산에 다니다 보니 오히려 수술 전보다 컨디션이 좋아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고 정기 검진을 받던 서경자(72·가명)씨가 정준 유방외과 교수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진료실을 나섰다. 서씨는 5년 전 목욕탕에서 우연히 가슴 부위를 만지다가 왼쪽 가슴 위쪽에 멍울이 만져지는 것을 느껴 부랴부랴 병원을 찾았다. 각종 검사를 받은 끝에 유방암 확진 판정을 받은 순간 서씨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소 대중목욕탕을 즐겨찾던 서씨는 우연히 유방절제술을 받은 사람을 보고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방이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파여있는 모습을 마주하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이제 남들도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겠구나’ 정 교수는 낙담하는 서씨에게 “기술이 좋아져서 가슴을 전부 드러내지 않고 암이 있는 부분만 절제하는 유방보존수술 시행률이 70% 가까이 된다”며 “비록 3기지만 수술이 가능한 단계”라고 안심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5년을 채웠다.
◇ 유형 따라 차이 큰 유방암…여성호르몬 수용체 많이 발현되는 유형이 60%
유방암은 단순히 암 크기와 림프절 또는 전신 전이 여부를 기준으로 구분되는 해부학적 병기 뿐 아니라 △발생 연령 △암의 병리학적 특성 △환자의 전신 컨디션 △심리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한다. 서씨의 정확한 진단명은 호르몬수용체 양성 유방암이었다. 세포 포면에 에스트로겐이나 프로게스테론 같은 여성호르몬 수용체가 많이 발현되어 있는 유형으로 전체 유방암의 약 60%를 차지한다.
호르몬수용체 양성 유방암은 혈중 여성호르몬이 많으면 그에 반응해 암세포가 번식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폐경기가 지난 여성은 수술 후 유방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 에스트로겐 생성에 중요한 호르몬인 아로마타제를 억제하는 약물 치료를 시행하는데 서씨의 경우 반응이 좋지 않았다.
정 교수는 고심 끝에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Next Generation Sequencing)을 시행했다. 그 결과 아로마타제 억제제에 반응이 떨어진다고 알려진 에스트로겐 수용체 돌연변이가 확인됐다. 표준치료에도 효과가 떨어지는 원인을 밝혀낸 것이다. 정 교수는 “흔히 사용하는 항호르몬제 대신 다른 약물을 처방했더니 효과가 있었다”며 “폐암 등 다른 암종에 비해 더디지만 머지 않아 전이성 유방암에서도 NGS를 기반으로 하는 정밀의학을 임상 현장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유방암 치료 발전에…가슴 지키는 유방보존수술이 전절제술보다 2배↑
정 교수는 2004년부터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유방암 수술과 연구에 뛰어들었다. 20년간 유방암 치료는 발전을 거듭했다. 가슴 전체를 들어내는 유방 전절제술이 수술의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조기 진단율이 높아지고 방사선요법이 발전하면서 절제 부위를 최소화하는 추세로 바뀐 것이 단적인 예다.
한국유방암학회에 따르면 2019년 유방부분절제술(유방보존수술) 시행률은 68.6%로 유방전절제술의 30.4%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유방암 전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조건 겨드랑이 림프절을 모두 제거하는 수술법(액와곽청술)이 당연시되던 데서 1990년대 이후 유방암이 림프절로 전이되는 길목인 ‘감시림프절’ 생검(조직검사)을 통해 림프절 보존 여부를 결정하는 수술방법이 도입됐다. 불필요한 림프절 절제를 줄여 합병증 위험을 낮추려는 시도였다. 정 교수는 “당시만 해도 암을 공격적으로 제거하는 게 원칙이었는데 감시림프절의 개념을 국내 처음 도입한 스승님을 도우며 배운 점이 많다”며 “수술 이후 삶의 질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가슴 깊이 새겼다”고 말했다.
◇ 40~50대 젊은 여성에서 호발…재발·합병증 부담 커
한국인 여성암 1위인 유방암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생한다. 2019년 암등록 통계에 따르면 40대 후반에서 유방암이 가장 많이 발생했고 50대 초반이 뒤를 이었다. 1기 이하에서 발견하면 5년 생존율이 96.6%나 된다. 그만큼 유방암 진단 이후 살아가는 기간이 길다는 의미다. 중간에 재발할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 오랜 기간 고통을 받는다. 유방암 수술의 대표적 합병증인 림프부종은 인체 내 체액배출을 담당하는 림프절이 제거되면서 림프액 순환이 어려워지고 팔과 손이 퉁퉁 붓는 증상이다. 수술 환자의 약 10~20%에서 발생하는데 심한 경우 피부가 딱딱해지면서 견디기 힘든 통증이 나타난다. 수술 후 2~3년이 지나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외과의사 입장에선 합병증 위험을 덜어주자고 재발 위험을 무릅쓴 채 수술을 미룰 수 없다. 유독 재발 위험이 높은 환자도 있다보니 때론 절제 부위를 최소화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환자별 재발 위험을 살펴 불필요한 수술을 최소화하고 꼭 필요한 치료만 시행한다면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삶의 질도 지켜줄 수 있을텐데.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합병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보며 안타까워 하던 정 교수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그가 20년 가까이 수많은 임상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 부작용 심하던 액와림프절 절제도 최소화 추세…"40세 이후 정기검진 힘써야"
정 교수는 “최근에는 감시림프절 검사에서 1~2개의 전이가 확인됐더라도 암이 크지 않고 유방보존수술 후 방사선치료가 예정되어 있다면 액와곽청술을 생략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유방보존수술과 전절제술이 재발률과 생존율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대규모 임상연구를 통해 입증됐기에 가능했던 변화다. 유방암으로 진단되면 가슴부터 겨드랑이까지 전부 도려냈던 과거 수술법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정 교수는 최근 림프부종을 예방하기 위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암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병이지만 의술의 발전으로 더는 사형선고가 아니다”라며 “40세부터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고 유방암이 발견됐다면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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