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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인프라의 힘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미국과 유럽이 자국에 반도체 생산 공장이나 연구개발(R&D) 시설을 짓는 대가로 지원하겠다는 보조금 규모는 각각 520억 달러와 430억 유로다. 이 둘을 합하면 우리나라 돈으로 100조 원이 훌쩍 넘는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기 위한 미국의 조치는 중국으로의 장비 반입 불허다. 이처럼 격해지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R&D와 생산에 필요한 장비·기반시설, 즉 인프라일 것이다.

인프라 뒷받침 없이는 R&D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다. 선도 기술을 빠르고 능률적으로 개발하려면 좋은 연구 장비이나 시설과 같은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중견기업 단독으로는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하기가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부족하고 전문인력 확보도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는 1995년부터 ‘산업기술 기반 구축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연구 장비 자산의 공유화를 추진해왔다. 연구소·테크노파크·대학과 같은 공공 연구기관에 장비와 시설을 설치해두고 기업이 원할 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공공기관은 단순 장비 대여와 관리 외에 제품 개발과 성능 향상에 필요한 기술 자문, 사업화 컨설팅 서비스도 제공한다.



공공기관 연구 인프라는 기업의 시제품 제작, 시험평가 분석, 수출 판로 개척 등을 종합 지원하는 중요한 국가 자원이 됐다. 자동차 부품 기업인 A사의 경우 차량 전동화에 필요한 새 부품을 개발했지만 성능평가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공동 활용 R&D 인프라의 지원을 받아 부품 신뢰성을 높였고 국내외 다양한 완성차 기업에 전기차용 부품을 대량 공급하는 성과를 거뒀다. 플라스틱 대체 물질을 개발하는 B사는 국내 연구기관이 구축한 실증 인프라를 활용해 우리나라 바다 환경에서 녹는 생분해성 플라스틱 소재에 대한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해외에 100% 의존하던 인증 문제를 해결했다.

기업의 연구 장비 활용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지난 10년간 약 4조 5000억 원을 투입해 전국 240여 개 센터에 1만 1500여 종류의 장비를 구축했다. 하지만 현장의 R&D 및 사업화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첨단산업과 신산업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선점하려면 기술 변화를 예측해 필요한 장비를 전략적으로 도입하고 국제표준에 따라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최근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세계 열강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첨단산업 기술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산업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R&D 인프라 확보는 국가 산업기술 발전을 위한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소다. 중소·중견기업의 기술 혁신과 세계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공공 R&D 인프라 확충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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