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화한 자율주행 기술력으로 편안하면서도 안전한 이동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자동차의 ‘솔(soul)’인 것처럼 저희도 완성차 제조사의 없어서는 안 될 ‘솔메이트’가 될 겁니다.”
윤팔주 HL클레무브 대표가 20일 경기 성남시 판교 제2테크노밸리에 있는 글로벌 연구개발(R&D)센터 ‘넥스트엠’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밝힌 포부다.
HL클레무브는 HL만도(204320)의 자회사로 HL그룹(옛 한라)에서 자율주행 사업을 전담하는 계열사다. 사명부터가 ‘똑똑한(Clever)’ ‘이동(Move)’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0여 년 넘게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모빌리티 업계가 먼저 찾는 세계 최고의 자율주행 기술 제공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윤 대표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윤 대표는 국내 1세대 자율주행 연구자다. HL그룹 자율주행 사업의 역사가 윤 대표의 손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자율주행과 처음 인연을 맺은 시점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도에서 선행개발팀장을 맡고 있을 때 소규모로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개발에 착수한 것이 시초다. ADAS는 센서로 차량 주변의 정보를 획득해 안전한 운전을 보조하는 장치로, 자율주행의 기본이 되는 기술이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의 유명 자율주행 스타트업 모빌아이가 막 설립되는 등 자율주행이라는 개념이 글로벌 시장에서 태동하던 시기였다.
국내에는 관련 기술이 전무했다. 무엇부터 연구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일단 호기심을 갖고 도전을 시작했다. 윤 대표는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은 레이더였다”며 “과연 우리가 레이더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일단 분석을 해보고 활용 방안을 고민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자율주행사업부가 설립된 뒤에도 투자 대비 성과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사내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적자가 매출보다는 적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독자 레이더 개발을 원점에서 새로 시작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실패를 용인한 그룹 최고 경영진 덕분에 자율주행 기술을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었다. 윤 대표는 “모든 신사업이 그렇듯이 자율주행사업부도 ‘천덕꾸러기’인 시절이 있었다”며 “그럼에도 그룹 최고 경영진이 연구를 독려해준 덕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HL그룹을 세운 고(故) 정인영 명예회장은 “사람이니까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내세우며 꾸준한 기술 개발을 강조해왔다. 대를 이은 정몽원 회장 역시 기술력 제고에 모든 경영 목표를 맞추라고 독려할 정도로 HL그룹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R&D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연구가 축적되자 서서히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현대자동차도 자율주행 기술을 조기에 국산화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HL그룹과 손을 잡았다. 윤 대표는 연구 시작 6년 만인 2014년 국내 최초로 ‘적응형크루즈컨트롤(ACC)’ 장거리 레이더 센서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센서는 앞 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주행하다 앞 차가 멈추면 따라서 멈추는 ACC 시스템의 핵심 부품으로, 이전까지는 외국 기술에 의지해왔다.
핵심 기술을 국산화하자 공급 단가도 낮아졌다. 국내 완성차 업계가 속속 ACC 기술을 도입했다. 윤 대표의 연구 성과가 국내 완성차 업계에 ‘레벨 2’ 자율주행 기술이 대중화되는 결과를 이끈 셈이다. 레이더 센서의 국산화로 산업 기술 혁신에 앞장선 점이 인정돼 윤 대표는 2016년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윤 대표는 리더십을 인정받아 2019년 글로벌 ADAS 사업부문(BU)장에 임명된 뒤 2021년 12월 출범한 HL클레무브의 초대 사장까지 맡게 됐다. HL클레무브는 HL만도의 ADAS사업부와 센서·전자제어장치(ECU) 제조 자회사 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가 합병해 탄생한 회사다. HL그룹 전반에 흩어져 있던 자율주행 관련 역량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출범 1년 6개월을 넘어선 지금, 윤 대표는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체감한다고 했다. 그는 “HL클레무브가 출범하며 소프트웨어 설계와 제품 개발·생산으로 이어지는, 자율주행과 관련한 완전한 밸류체인(가치사슬)을 갖추게 됐다”며 “R&D 역량과 글로벌 네트워크 또한 한 곳으로 모아 비로소 ‘완성형 회사’로 거듭났다”고 밝혔다.
윤 대표의 말처럼 HL클레무브는 레이더, 카메라, 자율주행 통합 제어기와 소프트웨어 등 사실상 자율주행 기술에 필요한 모든 제품을 개발해 양산하고 있다. 글로벌 부품 업계에서도 자율주행과 관련한 모든 밸류체인을 갖춘 몇 안 되는 회사다. 특히 60년 넘는 업력으로 스티어링·브레이크·서스펜션 등 부품 제조 역량을 고도화한 HL만도까지 모회사로 두고 있어 어떤 완성차·부품사와 비교해도 독보적인 경쟁력이 있다는 게 윤 대표의 설명이다.
윤 대표는 “HL클레무브는 인지·판단·제어라는 자율주행을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3가지 요소 기술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며 “센서나 소프트웨어 등 특정 영역에만 강점을 가진 자율주행 회사가 많은 반면 HL클레무브는 밸류체인의 모든 것을 쥐고 있어 고객사가 원하는 대로 상품화해 공급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10년 넘게 자율주행 솔루션 사업을 이어오며 2200건 이상의 특허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2000만 개 이상의 ADAS 제품을 공급해온 이력도 HL클레무브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완성차 제조사가 자율주행 기술의 내재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윤 대표는 HL클레무브의 역할이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레벨 3’ 이상으로 자율주행 단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력과 투자가 필요한 만큼 완성차 제조사가 모든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자체적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완성차 기업들은 능력 있는 자율주행 파트너가 당연히 필요할 것”이라며 “HL클레무브는 완성차 제조사의 부족한 퍼즐을 맞춰줄 수 있는 회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최근 모빌리티 업계의 화두로 떠오른 ‘소프트웨어중심차(SDV)’가 HL클레무브에 또 다른 사업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이퍼포먼스컴퓨터(HPC)’를 비롯해 SDV 체제에서 수요가 증가할 핵심 기술을 이미 확보해놓았기 때문이다.
SDV는 소프트웨어가 자동차의 주행·안전·편의 기능을 꾸준히 개선하는 시스템으로, 이를 위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대용량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HPC가 필요하다. 기존에는 수십 개의 제어기가 개별적으로 작동했다면 SDV에서는 HPC가 이를 하나로 묶어 처리한다. 이미 HL클레무브는 HPC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연구를 끝내고 올해 양산을 앞두고 있다. 윤 대표는 “자동차의 구조가 중앙 집중화되면 이를 제어할 장치인 HPC가 필수적”이라며 “자율주행이 고도화돼야 SDV 시대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만큼 둘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HL클레무브는 지난해 1조 3661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도 679억 원에 달했다. 출범 1년 차에 받은 성적표인 점을 감안하면 준수한 실적이다. 윤 대표는 “아직은 사업 규모가 크지 않다”면서도 “매출이 2조 원 규모로 증가할 2025년이 되면 사업이 안정세에 접어들고 규모의 경제 효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HL클레무브는 2026년까지 연평균 15%의 성장을 거두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로봇 플랫폼, 데이터 솔루션 등 모빌리티 신사업에도 도전해 2030년에는 매출을 4조 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이다.
모방할 기술조차 없던 불모지에서 자율주행을 HL그룹의 주요 먹거리로 키워낸 이력이 보여주듯 윤 대표는 도전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적자가 났을 때 자율주행 사업을 접었다면 HL클레무브라는 회사도 없었을 것”이라며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어려운 시기를 버텼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라고 말했다.
He is…
△1964년 경북 예천 △1987년 한양대 기계공학과 △1988년 만도 입사 △1989년 한양대 기계공학 석사 △2000년 한양대 자동차공학 박사 △2008년 만도 중앙연구소 시스템연구소장 △2019년 만도 글로벌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 BU장 △2021년~ HL클레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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