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관문이 좁고 문턱이 높아 거의 활용되지 않았던 한국은행의 발권력 지원이 1998년 이후 24년 만에 대폭 완화된다. 한은이 앞으로 은행이 지방채, 우량 회사채 등을 담보로 맡겨도 언제든 유동성을 제공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만 거친다면 비은행 예금 취급 기관에 대해서도 똑같이 지원하기로 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은행의 대출 채권까지도 적격 담보로 받아줄 방침이다.
보수적인 한은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감수하면서도 대대적인 대출제도 개편에 나선 것은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 사태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신용등급 변동 가능성이 있는 회사채는 물론이고 채무불이행 위험이 있는 대출 채권까지 담보로 발권력을 제공하기로 하면서 최종 대부자의 활동 반경을 넓힌 것은 그간 한은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큰 변화다.
한은 금통위는 27일 이 같은 방안을 담은 대출제도 개편안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현행 대출제도는 주요국보다 담보 증권 범위가 좁아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에 대처하기 어려운 만큼 한은법 테두리 안에서 시행 가능한 대책부터 마련한 것이다. 이날 이창용(사진) 한은 총재는 “SVB 사태를 계기로 부각된 디지털 뱅크런 가능성에 대비해 예금 취급 기관의 안전판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출제도를 개편하게 됐다”며 “앞으로 정부 및 감독 당국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대출제도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한은은 먼저 은행에 대해 상시 대출제도인 자금조정대출 적용 금리를 기준금리+1%포인트에서 기준금리+0.50%포인트로 하향 조정하고 최장 3개월 범위 안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대출 만기를 늘렸다. 특히 대출 적격 담보 범위를 3개월마다 한시적으로 포함해왔던 은행채, 9개 공공기관 발행채권에 더해 기타 공공기관 발행 채권, 지방채, 신용등급 AA- 이상 우량 회사채까지 확대한 뒤 이를 상시화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은행들은 일시적 유동성 부족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비공개로 한은에 다양한 담보를 맡기고 발권력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한은법상 은행과 같은 상시적인 대출제도로 지원하기 어려운 상호저축은행·새마을금고 등 비은행 예금 취급 기관에 대해서도 한은법 80조에 따라 금통위가 유동성 지원 여부를 검토해 신속하게 결정하기로 했다. 비은행 취급 기관도 은행과 동일하게 회사채 등을 담보로 맡기고 유동성을 지원받을 수 있다. 다만 금통위가 지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감독 당국과 한은이 수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로써 은행과 비은행이 한은으로부터 조달할 수 있는 유동성 규모는 각각 90조 원, 100조 원 등 19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마지막으로 한은의 대출 적격 담보에 예금 취급 기관의 대출 채권을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은행은 현행법상 법적·실무적 검토와 제도 개선, 전산 시스템 구축 등 약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금통위 의결 이후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비은행 예금 취급 기관은 한은이 충분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도록 공동 검사와 자료제출요구권에 관한 제도적 여건이 갖춰진 후에나 검토하기로 했다.
한은은 이번 제도 개선으로 금융의 디지털화로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날 수 있는 뱅크런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예금 취급 기관들이 유동성 확보를 위해 보유 증권을 시장에 투매할 경우 나타날 시장 불안도 방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다만 정부나 금융 당국의 협조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한계도 있다.
홍경식 한은 통화정책국장은 “1998년 한은법 개정 이후 위기가 있을 때마다 담보 범위를 한시적으로 확대했는데 이번에는 범위를 더 늘리고 상시화한다는 측면에서 큰 변화”라며 “정부도 한은과 협의하면서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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