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료를 뺄 수도 없어 난감합니다.”
서울 강동구에서 작은 분식점을 운영하는 정 모(43) 씨는 요즘 시장에 갈 때마다 얼굴에 그늘이 가득해진다. 이전에는 당일 구매한 신선한 재료를 당일 소진하는, 소위 음식 장사 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제는 당근·오이·시금치·상추 등 가격이 급등하며 장을 보는 일 자체가 두려워졌다. 정 씨는 “쌀 때 많이 사서 쟁여 둘 수 있는 김밥 속 재료가 없을지 고민해봤지만 햄 말고는 딱히 없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직접 나서 라면 값을 약간 끌어내리기는 했지만 봉지 라면을 제외한 다른 음식 재료 가격이 치솟으면서 자영업자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다. 유례없는 폭우에 폭염까지 더해지며 채소와 닭고기·계란 등의 가격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 전기요금·인건비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더 깊어지고 있다.
28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농산물 유통 정보에 따르면 27일 기준 김밥의 주재료인 시금치(140.8%), 오이(84.3%), 당근(12.2%), 깻잎(116.0%) 등의 도매가가 1개월 전에 비해 크게 올랐다. 계란 가격도 동반 상승 중이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같은 날 기준 특란(60g 이상~68g 미만) 30구의 소비자가격은 6541원으로 한 달 전 대비 4.3%가 올랐다. 지난해 같은 기간(6742원)보다 0.3% 내리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조류 인플루엔자(AI)라는 일회성 단기 변수가 작용했었다. 2월 중순 계란 값이 4000원대였음을 감안하면 한여름 자영업자들의 체감 가격 상승률은 높을 수밖에 없다. 라면 값이 봉지당 50원, 100원 내렸다고는 하나 분식집에서 라면을 조리해서 판매할 경우 계란·채소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라면 메뉴 가격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게 자영업자들의 하소연이다. 물론 그렇다고 김밥이나 라면 메뉴 가격을 당장 올리기도 쉽지 않다. 그간의 물가 상승에 따라 이미 기본 라면 메뉴 가격이 5000원을 넘어선 곳이 대부분이다. 프랜차이즈 분식점의 경우 김밥 가격이 5000~8000원에 이른다.
이로 인해 계절별 가격 변동이 덜하고 식감은 비슷한 채소를 찾아 기존 재료를 대체하거나 아예 재료를 줄이려는 절박한 움직임도 시중에서 감지된다. 시금치나 오이 대신 궁채, 오이 고추 등을 사용하는 식이다. 실제로 오이 값이 2배 가까이 오르는 동안 오이 고추 도매가는 53.6% 내렸다. 또 김밥에 채소 대신 유부를, 토스트에 계란 대신 순두부를 넣는 등 다소 기발한 메뉴가 자영업자 커뮤니티 등에서 공유되고 있다. 슈링크플레이션(가격은 그대로 둔 채 수량·무게·용량 등을 줄이는 방식) 전략만 고수했다가는 단골 손님이 줄어들 수 있어서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농산물과 닭고기·계란 가격 상승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농산물의 경우 생육 기간이 최소 한 달 이상 필요한 데다 전체 재배 물량 중 3분의 1 이상은 품질 저하로 현재 출하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또 양계 농가는 지난해부터 공공요금 인상 여파로 생산비 절감 차원에서 사육 마릿수를 줄여왔는데 추가로 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폭우로 100만 마리가 넘는 닭이 폐사한 점도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폭염과 폭우 피해가 점차 농산물·축산물 등의 가격에 반영될 것”이라며 “추석을 앞두고 당분간 물가는 상승세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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