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가 재정적자와 정부 부채를 이유로 미국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한 것은 재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확장 재정 기조를 유지한 문재인 정부에서 나랏빚은 600조 원에서 1000조 원으로 400조 원이나 늘어났다. 코로나19가 본격화한 2020년 이후에는 연평균 국가채무 증가율이 13.9%에 달했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향이 남의 일만은 아닌 상황이다.
기획재정부는 2일 한국은행 등 관계 기관과 시장 상황 점검 회의를 열고 미국 신용등급 강등에 따른 시장 영향을 점검했다. 방기선 기재부 1차관은 “2011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등급 하향보다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필요 시 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를 신속하게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평가다. 우리나라 국가채무(중앙정부 기준)는 2018년 680조 5000억 원에서 지난해 말 1067조 7000억 원으로 뛰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역시 35.9%에서 49.6%로 급등했다. 스위스 국가경영개발대학원(IMD) 국가 경쟁력 평가의 ‘재정’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순위가 2018년 22위였지만 올해는 40위 곤두박질친 이유다.
올해도 쉽지 않다. 40조 원이 넘는 세수 결손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예산 통과 과정에서 잡았던 관리재정수지는 58조 2000억 원 적자였지만 세금이 예상보다 40조 원 덜 들어오면서 올해도 100조 원의 적자가 불가피하다. 현 정부의 건전 재정 기조가 무색해지는 결과다.
더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에서는 ‘선심성 돈 풀기’ 예산이 쏟아지고 있다. 여야가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 처리를 합의했다가 ‘총선용 지역구 예산 챙기기’라는 여론 비판에 상정을 연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떠 ‘35조 원의 민생 추경’을 주장하면서 “국채 발행까지 고려하자”고 나섰다.
방만한 돈 풀기를 막을 재정준칙은 국회에서 잠들어 있다. 앞서 피치와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우리나라 재정준칙 도입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도입을 권고한 바 있다.
한편 이날 원·달러 환율은 미 신용등급 하락 소식에 전날보다 14.7원 오른 1298.5원에 장을 마쳤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중국 제조업 경기가 위축되면서 반도체 수출이 부진한 만큼 원화 약세가 예상된다”며 “무역수지도 적자를 벗어났으나 불황형 흑자인 만큼 원화 강세로 이어지기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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