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강원도 태백시 가덕산 해발 1200m. 초속 7m의 빠른 바람이 부는 산등선을 따라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은 국내 첫 주민 참여형 풍력발전 사업이자 하나은행·삼성화재 등 금융권이 자금을 댄 ‘태백가덕산풍력발전소’다. 총 3단계에 걸쳐 최종 완공될 이곳 발전소는 1단계 사업에서 풍력발전기 12기, 2단계 사업에서 5기가 건립됐다. 현재 구축된 설비용량만 64.2㎿에 이른다. 2026년 총 12기로 계획된 3단계 사업까지 마무리되면 약 43㎿가 추가될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태백가덕산풍력발전소에 투입된 사업비는 1단계와 2단계를 합쳐 총 1885억 5000만 원. 강원도와 태백시·한국동서발전·코오롱글로벌이 주축이 돼 사업을 추진했지만 이들이 투자한 규모는 전체 사업비 대비 20%에 불과하다. 나머지 80% 가운데 4%는 주민 참여형으로 조달했고 76%에 해당하는 1438억 6000만 원은 하나은행·삼성화재·동양생명·NH손해보험 등 금융권에서 구성된 대주단으로부터 조달했다.
대규모 투자를 받은 만큼 성과도 좋다. 최대 발전량 대비 실제 발전량 비율을 뜻하는 ‘이용률’이 태백가덕산풍력발전소는 30%대에 달한다. 국내 육상 풍력발전의 평균 이용률(20%대)을 웃돌면서 전기 생산이 순조롭게 되고 있다. 권오철 태백가덕산풍력발전소 대표는 “1단계와 2단계 사업 시작 이후 투자금에 대한 상환 스케줄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다”며 “수익성이 좋다 보니 앞으로 계획된 3단계 사업에도 기존 투자자들이 그대로 들어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금융권에서 ‘그린파이낸싱(녹색금융)’에 주목하고 대규모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이 사업은 삽조차 뜨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세계적으로 그린파이낸싱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가운데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제사회가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기 위한 ‘탄소 중립’을 선언했으며 우리 정부도 이에 동참하기로 한 상태다. 이는 단순히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 각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정부 정책에 따라 고탄소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의 생산 비용이 올라가고 수익성이 떨어지면 이들 기업과 관련된 금융자산을 보유한 금융기관들도 건전성 부문에서 위험 부담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따라 기후변화 대응 및 친환경 사업을 위한 자금 수요가 늘고 있고 금융회사들도 이와 관련한 금융 서비스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유럽투자은행(EIB)과 같은 다자 개발 은행이 발행한 녹색 채권은 2007년 8억 달러에서 2020년 320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되는 등 13년 사이에 400배나 성장했다.
특히 그린파이낸싱은 미래 먹거리가 필요한 국내 금융권에도 새롭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자발적 탄소배출권 시장(VCM)’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국내 금융 당국도 VCM 도입을 논의하면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탄소배출권 시장은 탄소 감축 의무가 있는 규제 대상 기업이 배출권을 사고파는 규제적 시장(CCM)과 감축 대상이 아닌 기업이나 기관 등이 자율적으로 감축 활동을 해 얻은 탄소 크레디트(인증서)를 거래하는 VCM으로 나뉜다.
최근 들어 국내 금융권에서도 태백가덕산풍력발전소 같은 친환경 사업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단순히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사회적 책임을 넘어 금융회사들이 저탄소 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고탄소 산업 대비 대출 비중을 확대하는 등 관련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일례로 전기차 충전 사업을 전개하는 ‘차지비’는 올해 5월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위해 하나은행으로부터 200억 원 정도의 대출을 받았다. 김상범 차지비 부사장은 “정부가 민간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보조금을 줄이는 상황에 금융권으로부터의 외부 자금이 필요했다”며 “최근 은행권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대출을 받을 때 우대금리 혜택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은행으로부터 받은 대출금을 활용해 차지비는 최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초고속 충전기 2기를 포함, 총 60여 기의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했다. 서울시와 각각 5억 원씩 총 10억 원을 투자했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은 “기업들이 정부 정책에 따라 탄소 배출 감축이나 재투자 계획 등을 세우는 과정에서 파이낸싱이 필요할 것”이라며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는 컨설팅에서 시작해 탄소 크레디트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금융권이 주요 플레이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