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리(주문생산) 시장 복귀를 선언한 전통의 반도체 강자 인텔이 1.8나노(㎚·18A)급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첫 공개하며 TSMC·삼성전자(005930)에 ‘선전포고’를 날렸다. 한 발 빠른 1.8나노 진입으로 2024년에는 삼성전자를 제치고 ‘파운드리 2위’에 오르겠다는 각오다. 대만과 한국의 초미세공정 싸움에서 낙오됐던 미국 반도체 업계가 미·중 갈등과 리쇼어링 열풍에 힘입어 ‘원조’의 저력을 내비치고 있다.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19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이노베이션 2023’ 행사에서 1.8나노 반도체 웨이퍼를 깜짝 공개했다. 1.8나노는 TSMC와 삼성전자가 양산중인 3나노보다 두 단계 더 나아간 최선단 공정으로 내년 1분기 첫 웨이퍼를 팹(Fab·공장)에 투입할 계획이다. 겔싱어 CEO는 “인텔이 제시했던 ‘4년 내 5단계 공정 도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1.8나노 웨이퍼 공개는 파운드리 복귀 후 3년간 ‘뒤쫓기’에 바쁘던 인텔이 도리어 경쟁사들을 넘어섰다는 선언이다. 한때 TSMC와 삼성전자의 초미세공정 경쟁에 밀려 영원히 파운드리 경쟁력을 되찾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받았던 인텔의 ‘화려한 복귀’라는 평가가 따른다.
◇ 인텔, 파운드리 복귀 4년만에 TSMC·삼성 따라잡아
인텔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시장 지배자로 명실상부한 반도체 업계 1위 기업으로 군림해왔다. 반도체 설계 또는 생산에 머무는 경쟁사들과 달리 설계와 생산을 함께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써, 설계와 생산 양측에서 세계 최고 수준 기술력을 자랑해왔다.
장기간 반도체 업계를 지배해오던 인텔의 패권은 2010년대 들어서 흔들려왔다. 스마트폰 시대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해 ARM에게 모바일 표준을 내줬다. PC 시장에서는 AMD가 치고 올라왔다. 제조 분야에서는 TSMC와 삼성전자가 초미세공정 파운드리 경쟁을 펼칠 때 10나노 이하로 진입하지 못하며 낙오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절치부심한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 복귀를 천명했다. 미·중 패권분쟁 격화 속 반도체 리쇼어링이 추진되며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 파운드리 ‘전략자산’으로 지목된 것이다. 뒤쳐진 공정을 따라잡기 위해 4년 간 5단계의 공정을 뛰어 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무리한 계획이라는 평가가 따랐지만 인텔은 목표한 양산 시점을 차곡차곡 밟으며 이날 1.8나노 웨이퍼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2024년에는 ‘패스트팔로워’를 넘어 파운드리 업계를 선도하겠다던 목표 달성이 목전에 이른 것이다.
무리한 첨단공정 자랑도 아니다. 이미 인텔은 7나노 반도체를 대량 생산 중이다. 갤싱어 CEO는 이날 행사에서 “4나노는 양산 준비가 완료됐고 3나노는 연말 양산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4나노로 자체 제작한 14세대 개인용 CPU ‘인텔 코어 울트라(메테오레이크)’는 12월 출시하고, 내년 상반기에는 3나노 CPU들이 시장에 등장할 전망이다. 3나노 양산에 돌입한 TSMC와 삼성전자 공정을 연내 따라잡게 되는 것이다.
인텔은 이와 함께 초미세공정을 뒷받침할 신기술들을 대거 선보였다. 개방형 칩렛(반도체 조각) 표준화 기술 ‘UCIe’의 첫 시범버전 공개가 대표적이다. UCIe는 타 공정에서 각각 생산한 반도체를 패키징해도 작동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인텔에서 만든 3나노 칩셋과 TSMC에서 만든 3나노 칩셋을 결합해 최종 반도체를 완성하는 식이다. 여기에 최근 2030년 양산 목표로 공개한 유리기판 기술도 더해진다. 유리기판은 기존 플라스틱 회로기판(PCB)보다 미세하고 복잡한 회로를 그릴 수 있어 반도체의 잠재력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다. 갤싱어 CEO는 “초미세공정과 UCIe, 유리기판 기술로 2030년까지 무어의 법칙(2년마다 반도체 성능이 2배로 오른다는 인텔 공동창립자 고든 무어의 이론)을 연장시키겠다”고 강조했다.
◇ 아직 EUV도 안 쓴 인텔, 공정 미세화 가속 붙는다
예상보다 빠른 인텔의 초미세공정 돌입에 삼성전자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인텔은 4나노부터 삼성전자·TSMC가 사용중인 극자외선(EUV) 장비를 적극 도입해 공정 미세화를 더욱 서두르고 있다. EUV는 기존 불화아르곤(ArF)보다 파장이 14분의 1에 불과해 초미세공정 필수 장비로 꼽힌다. 미국이 중국 판매를 막아선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이기도 하다. 역으로 말하면 인텔은 그간 EUV 없이도 공정 격차를 좁혀왔다는 뜻이다. 인텔은 당초 내년 2나노 양산 계획을 제시했으나 이날 발표에서는 내년 말까지 1.8나노까지 양산 단계에 진입하겠다고 목표를 수정했다. 나아가 1.2나노까지 진입해 경쟁사를 따돌리겠다는 계획이다.
인텔은 내년부터 파운드리·설계 사업부를 ‘제조그룹’으로 분리해 타 사업부와 ‘거래’를 하도록 할 계획이다. 데이빗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내년 제조그룹 연 매출이 200억 달러로 업계 2위 수준이 될 전망”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TSMC는 750억 달러,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208억 달러의 연 매출을 올렸다. 외부 수주를 감안하면 인텔 파운드리가 삼성전자를 뛰어넘어 업계 2위에 오를 공산이 크다.
최근 미국 제재에도 7나노 양산 소식을 알린 중국 SMIC 또한 김이 새긴 마찬가지다. 넓게는 대만과 TSMC를 압박 중인 중국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설령 대만이 점령당하더라도 미국이 자체적으로 최 선단 공정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라며 “기술 패권경쟁에서 미·중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