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옻칠을 한 판 위에 자개를 수놓은 ’나전칠기'는 과거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색을 입히는 재료 ‘옻’과 장식을 하는 재료 ‘자개’는 구하기가 어렵고, 제작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려 비싼 공예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파트 위주의 삶이 시작되고 서구 감성의 가구와 그릇이 유행하면서 나전칠기는 점차 사라졌고, 보존해야 할 전통 예술의 한 기법은 잊혀지고 있다.
칠예가 전용복(76)이 옻칠과 자개를 ‘회화’에 적용한 이유다. 오는 10월 28일까지 경기도 용인 갤러리위에서 열리는 전시 ‘바람 색채 그리고 빛’에서 작가는 “아직도 옻칠을 예술 작품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며 “공예품 제작에만 머물러 있으면 고구려 시대부터 사용된 우리 고유의 옻칠 기법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며 이번 전시의 취지를 설명했다.
전용복은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1991년 일본 도쿄 메구로(目黑)의 대형 연회장 가조엔(雅敍園)의 칠예작품 5000여 점을 3년여 간 직접 복원해 일본에서는 ‘옻칠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전설적 인물이다.
평생 ‘어떻게 하면 옻칠의 위대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아온 그의 작품 제작은 ‘혁신'에 가깝다. 메구로가조엔에서는 엘리베이터를 옻칠과 자개로 장식했고, 한국에 돌아와 상업 제품 장식 작업을 접고 ‘회화’ 작품 제작을 시작한다. 모두 ‘옻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가로 6m, 세로 2m의 ‘귀향’이지만 작가는 ‘갈대’ 작품에 더 집중하고 있다. 자개로 갈대를 만들어 낸 ‘바람소리’ 연작을 두고 작가는 “작가가 하나의 상징적 소재를 갖고 있어야 작품을 널리 알릴 수 있고, 옻칠 기법을 알리는 데도 좋다고 생각했다”며 “3년 전부터 갈대만 그리기로 결심했고, 갈대만으로 수많은 기술을 표현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용복이 옻칠을 회화로 만든 혁신가라면, 이신자(93)는 여성들의 취미로 여겨지던 자수를 남성 위주의 미술 시장에 내놓은 또 다른 혁신가다. 자수는 주로 한복과 병풍을 장식하는 데 쓰인다. 꽃과 나무 등 주로 동양적 소재를 만든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한 1세대 섬유예술가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에서는 이런 작품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시관에는 기존의 관습을 모조리 깨버린 젊은 여성 혁신가의 대담한 실험적 작품이 가득하다.
작가는 실로 천을 메우는 전형적 자수의 방식을 버리고 추상회화 작가가 그린듯한 엉뚱한 여동생의 얼굴, 천을 투박하게 이어붙인 아플리케 작품을 선보이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처음 감고, 뽑는 새로운 기법은 환영받지 못했다. ‘발가락으로 수를 놓았느냐’며 질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1956년과 195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평가가 달라졌다. 창호지나 나무, 망사 등 천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자수 기법을 버리고, 노끈, 올 등 굵기와 질을 골라가며 주제에 맞게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그의 작품 제작 방식은 언론을 통해 호평 받았다.
이신자 역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섬유예술이라는 말조차 없던 1970년대 해외에서 태피스트리(직물)에 눈을 뜨고, 이를 국내에 도입한 것. 1960-70년 대는 김구림, 성능경 등 수많은 남성 실험미술가들이 획기적인 재료와 방식으로 예술의 변화를 도모하던 시기였다. 태피스트리라고 안 될 것도 없었다. 1972년 국전에 출품한 태피스트리 작품 ‘벽걸이’는 올 풀기를 통해 독특한 표면 질감을 표현하며 주목 받았다. 이미 짜인 실을 밖으로 돌출 시키는 것은 ‘마감 마저 완벽해야 한다’는 기존 수놓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가로 길이가 19m에 달하는 대작 '한강, 서울의 맥'이다. 해외에서 대형 태피스트리를 접하고 놀랐던 작가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3년간 한강변 풍경을 흑백 수묵화처럼 그린 이 작품에 매진한다. 열정은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섬유 미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아져서 좋고, 회화 분야에서 빠지지 않는 분야로 성장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전시는 내년 2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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