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대 대기업 삼성전자가 갑질의 피해자가 됐다.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의 ‘협박’에 울며 겨자먹기로 브로드컴 제품을 장기간, 필요 이상으로 구매해야 했다는 점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것이다. 공정위는 브로드컴에 과징금 191억 원을 부과했다. 제도에 따라 부과할 수 있는 최대 수준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브로드컴은 반도체 부품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진 사업자다. 이 사건과 관련된 핵심 부품만 떼어 놓고 보면 시장 점유율(2018년 기준)은 92.4%에 달했고, 삼성전자의 브로드컴 의존도는 99.8%나 됐다. 그러던 중 퀄컴 등 다른 사업자들이 해당 부품 시장에 뛰어들었고, 2019년경 삼성은 부품 공급처를 다변화하고자 경쟁사들의 부품을 채택하게 된다. 그러자 브로드컴의 시장 점유율(2019년)은 77.3%, 삼성전자의 의존도는 72.7%로 1년새 뚝 떨어졌다. 이에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다.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우리가 증오하는 경쟁업체”의 부품을 채택한 것에 “매우 실망스럽다”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낸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 브로드컴이 꺼내든 카드가 장기구매계약(LTA)이다. 2020년초 브로드컴이 LTA를 통해 요구한 내용은 이렇다. △2021년부터 3년간 매년 브로드컴 부품을 7억 6000만 달러 이상 구매하고 △실제 구매 금액이 이에 미치지 못할 경우 그 차액을 배상하라는 것이다. 특히 브로드컴은 LTA 협상을 앞두고 삼성전자에 부품 공급을 재검토하겠다고 통보했고, 협상이 시작되자 삼성전자의 주문을 실제로 받지도 않았다. 삼성전자가 계속 LTA 체결에 난색을 표하자 부품 선적과 생산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결국 2020년 3월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이 요구대로 LTA를 체결했고, 이에 브로드컴은 즉시 부품 선적과 생산 등을 재개했다.
공정위는 2020년 6월 브로드컴의 경쟁사인 퀄컴의 신고로 이 사건을 처음 인지했고, 이듬해 2월 브로드컴을 상대로 현장 조사를 벌인다. 그리고 같은해 5월 브로드컴과 삼성전자는 돌연 LTA 관련 재협상을 진행, 그리고 약 3개월 후인 8월에 계약을 종료하게 된다. 공정위의 본격적인 조사 후 LTA가 종료됐다는 점에서 브로드컴이 수습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정위 관계자 역시 “2021년 2월 공정위의 현장조사가 있었고, 그 다음달인 3월에는 유럽연합(EU)의 조사도 있었다”며 “한국과 EU의 경쟁당국이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액션을 취한 것이 상당 부분 (재협상 착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공정위는 2022년 1월 브로드컴을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의견서를 발송하며 본격적으로 제재 절차에 착수했다. 그러자 7월경 브로드컴은 공정위에 ‘동의의결’을 개시해달라고 신청한다. 즉 자진시정하겠으니 자사 행위의 위법 여부를 가리는 절차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공정위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듬해 1월 브로드컴은 자진시정안(동의의결안)을 마련한다. △삼성전자 등에 LTA 체결 강제 행위를 중단하고 △반도체 중소업체 지원 및 인력 양성을 위한 200억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하지만 브로드컴의 제안이 삼성전자가 입은 피해에 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징시전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 브로드컴의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사건의 주요 쟁점은 △브로드컴이 거래상 지위가 있는지 △LTA가 삼성에 일방적으로 불리했는지 △LTA 체결에 따른 피해가 명확한지 등이었다. 브로드컴은 글로벌 기업인 삼성이 거래상 열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시장에서 LTA를 통해 삼성은 안정적으로 부품을 조달했으며 LTA 체결로 삼성이 입은 피해를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공정위는 세 가지 쟁점 모두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주며 과징금을 부과했다. 먼저 브로드컴에 대한 삼성의 의존도가 최대 99.4%에 달해 거래상 지위가 있다고 봤다. 또 브로드컴이 삼성에 취한 조치를 스스로 ‘폭탄 투하’ ‘핵폭탄’에 비유하며 삼성에 심각한 피해가 가해질 것을 인지했었다는 점에서 LTA가 상호 호혜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LTA 체결로 삼성은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억지로 8억 달러의 부품을 구매했다며 실질적인 피해가 있다고 봤다.
일각에서의 ‘과징금 규모가 너무 작은 게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 공정위는 제도상 가능한 최대 과징금을 부과했다는 입장이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과징금은 관련 매출액에 부과 기준율(현재 4%·사건 당시 2%)을 곱해 산정한다”며 “삼성이 LTA 이행을 위해 구매한 금액이 매출액에 모두 반영됐고 부과 기준율도 상한 2%를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공정위의 조사 착수 이후인 2021년 8월 LTA가 조기에 종료되며 과징금 규모는 200억 원에 못 미쳤다. 공정위 제재가 브로드컴이 마련한 자진 시정안(동의 의결안) 내용에도 못 미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 의결과 정식 사건 처리는 기본적으로 취지와 요건이 달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브로드컴은 즉각 반발했다. 브로드컴은"브로드컴은 수십년간 공정하고 법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한국 고객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며 “한국 경제와 최대 규모의 기술 기업들의 혁신과 성공에 크게 기여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정위의 결정에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향후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과징금 부과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삼성 역시 민사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 관계자는 “공정위가 브로드컴의 위법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삼성이 추후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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