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관리청이 감염병 병원체 검사에 정식으로 허가받지 않은 ‘무허가 진단기기’를 사용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에 허가된 진단기기가 없으면 용역업체에 의뢰해 제작한 진단기기로 병원체 검사를 하던 관행이 관련법 제정 이후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경우 제조공정상의 문제가 발견돼도 즉각 대응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위탁제조해온 제품에 대해 긴급사용승인이나 예비 위기대응 의료제품 지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2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질병관리청에서 제출받은 ‘감염병 진단기기 개발 및 생산 용역현황’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3년 8월까지 질병관리청은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절차를 거치지 않고 주문제작 또는 연구용역 형태로 17개 업체에서 3만 5000회 분 23억 7000억 원 어치 진단기기를 만들어 감염병 병원체 검사에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도별로 보면 2017년 조류인플루엔자 등 진단기기 5500회분, 2018년 에볼라바이러스 등 진단기기 320회분, 2019년 에볼라바이러스 등 진단기기 7505회분, 2020년 코로나19 등 진단기기 1만 7040회분, 2021년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진단기기 944회분, 2022년 엠폭스 등 진단기기 3804회분, 2023년 엠폭스 등 진단기기 300회분 등이다. 질병청의 의뢰로 생산된 제품 중 일부는 대국민 검사에도 사용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쯔쯔가무시 등 진드기매개질환, 홍역, 풍진,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진단기기로 1만 2400회분이다.
문제는 이렇게 생산한 진단기기들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안전·품질검증 없이 검사에 사용됐다는 점이다. 감염병예방법에 따르면 감염병 진단 시 식약처로부터 정식 허가된 제품을 구매해 사용해야 한다. 식약처 허가를 받은 진단기기의 제조업체는 체외진단기기법 및 의료기기법에 따라 시설·기구 및 장비를 갖춰 제조허가를 받고 품질책임자를 두면서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질병관리청의 용역의뢰로 만든 제품은 품질에 문제가 발생해도 품질관리 대상에서 제외돼 빠른 대응이 어렵다. 실제로 진단기기 내 진단 용액이 오염되거나 진단기기의 정확도가 떨어지며 ‘사용중지’ 권고되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나온다. 국내에서도 식약처가 진단기기 용역업체 실사를 진행한 결과 몇 곳에서 제조공정상 문제가 발견돼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질병청은 “법정 감염병 등을 진단할 때 통상 식약처에서 정식 허가된 제품을 구매해 사용하고 있지만 상용화된 허가제품이 없는 경우 질병청이 직접 검사법을 개발하고 원재료를 확보해 필요할 때마다 조합해 사용한다”며 “연구용역 등을 통해 개발된 검사법에 대해 평가한 후 질병청이나 보건환경연구원 사용분으로 제조해 검사에 활용한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최 의원이 질병청과 식약처 제출자료를 비교한 결과, 기존 허가제품이 존재하는데도 용역업체를 통해 허가 받지 않은 진단기기를 사용하거나 용역기간이 종료됐는데도 추가 생산해 연구용역 비용보다 더 많은 금액만큼 진단기기를 생산하고 있는 사례가 다수 드러났다. 오상헬스케어가 질병청에 용역으로 제공한 쯔쯔가무시증 등 매개체 전파세균 진단기기의 경우 용역비용은 4200만 원 이었다. 하지만 용역종료 후에 생산(구매)된 금액은 1억 5600만 원이었다. 코젠바이오텍이 담당했던 엔테로바이러스 감염증 진단기기 용역은 1349만 원 규모지만 추가 생산(구매)된 금액은 1억 500만 원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국회가 국내에서 감염병 검사 제품에 대한 법안을 제정했음에도 질병청은 엠폭스 등을 진단하면서 관행대로 용역업체에 제품을 의뢰해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021년 3월 제정된 ‘공중보건 위기대응 의료제품의 개발 촉진 및 긴급 공급을 위한 특별법’에 따르면 식약처장이 감염병 대유행상황에 대비하는 제품을 지정하고 필요하면 감염병 검사 제품을 긴급 사용승인하고 생산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사항은 질병청 등 관계부처가 위원회에서 심의할 수 있다.
최 의원은 “코로나19 대응과정을 바탕으로 감염병 대유행 상황에 대비하는 국가체계를 구축한 ‘위기대응의료제품법’이 마련됐음에도 질병청은 정해진 절차를 따르지 않고 관행처럼 감염병 진단기기들을 위탁제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새로운 법률이 제정된 만큼 질병청이 그동안 위탁제조해온 제품에 대해서는 긴급사용승인이나 예비 위기대응 의료제품 지정 절차를 진행하고 기존 허가제품이 없는 신종 감염병 진단기기 생산 시 부처간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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