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란 무엇일까요? 오로지 한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일 수도, 많은 것을 한꺼번에 능히 해내는 사람일 수도 있죠. 만약 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요?
음악에서도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재능을 드러낸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 사람’만큼 다재다능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작곡가이자 지휘자였고, 피아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했어요. 교향곡을 작곡할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박식했지만, 상반된 분위기의 뮤지컬 작곡을 해낼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충만했습니다. 오늘은 미국의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거장의 내면에서는 무슨 일이
오는 6일 개봉을 앞둔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번스타인의 삶을 깊숙이 담아낸 작품입니다. 넷플릭스 제작으로, 오는 20일에는 넷플릭스에 공개될 예정이죠. 앞서 ‘스타 이즈 본’으로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과 주연을 모두 맡았습니다. 브래들리 쿠퍼는 “지금까지 예술 작품을 두려움 없이 제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서도 “하지만 번스타인의 이야기는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바로 레니(번스타인)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밝히기도 했죠.
쿠퍼는 번스타인을 연기하기 위해 분장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요. 분장감독인 카즈 히로와 함께 총 5단계에 걸친 특수 분장을 해냈죠. 턱과 입술, 코, 귀를 일일이 디자인한 분장으로 길게는 5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지만, 쿠퍼의 노력 덕분에 스크린 속에서 번스타인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브래들리 쿠퍼의 팬이라면 “이게 쿠퍼라고?” 싶은 순간들이 많을 거예요. 번스타인의 아내인 ‘펠리시아(캐리 멀리건 분)’의 분장도 마찬가지여서,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쇠약해진 모습을 구현해냈죠.
영화는 번스타인과 아내 펠리시아의 일생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다루면서, 번스타인의 삶 속 빛나던 순간들에도 주목합니다. 번스타인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 온 유대인 부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해요. 영화는 번스타인의 유년 시절을 다루지 않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는 그의 회상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죠.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죠. 1943년 그는 부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중 당시 거장이었던 브루노 발터가 컨디션 난조로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급하게 대타로 단상에 오르게 됩니다. 리허설도 없이 갑작스럽게 진행된 공연이었지만, 번스타인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면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윽고 번스타인은 펠리시아를 만나는데요. 칠레 출신의 여배우였던 펠리시아와 사랑에 빠진 번스타인은 1951년,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영화는 이들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려냅니다.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저평가받던 뮤지컬에도 열중하던 번스타인을 격려하죠. 그 자신도 피아노를 배운 경험이 있기에, 그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직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사한 외모와 좋은 언변,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번스타인은 방송 출연을 계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올립니다. 펠리시아와도 세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이대로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는 듯했죠. 하지만 ‘소울 메이트’ 같은 부부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요. 바로 번스타인이 남자도 좋아하는 양성애자라는 점이었죠.
영화에는 펠리시아를 정신적으로 원하면서도 남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번스타인의 모순적인 태도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습니다. 펠리시아는 사랑이 넘쳐난다는 박애주의(?)적인 번스타인의 태도를 반박합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아니라 온통 증오뿐”이라고요. 볼 일을 볼 때조차 화장실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사람과의 교류를 좋아하던 번스타인이지만, 내면에는 끊이지 않는 유명세와 유년 시절의 갈등, 예술에 대한 강박에서 나오는 황폐함이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번스타인을 사랑했던 펠리시아는 모든 것을 참아내려 하지만, 이들은 곧 별거를 결정하게 됩니다.
영화의 백미는 1973년 번스타인이 영국 캠브릿지셔 엘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말러 교향곡 2번 공연입니다. ‘부활’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죽음에 대한 웅장하고 심도 있는 고찰을 펼쳐 나갑니다. 번스타인은 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말러의 곡을 발굴한 인물로도 뽑힙니다. 당시 공연은 소프라노 실라 암스트롱과 메조소프라노 자넷 베이커, 에딘버러 페스티벌 합창단이 함께 했는데요.
쿠퍼의 지휘는 영상으로 남아 있는 번스타인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공연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쿠퍼의 몸짓에 전율을 느낄 거예요. 원래도 극적인 몸짓으로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한 번스타인이지만, 이때 그가 느끼는 환희는 수십 년의 시간을 지나 관객들에게도 인상 깊게 전달됩니다. 클래식에 대한 복잡한 배경지식을 알지 못해도 그렇죠. 내면의 소리를 잃지 않고,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줄곧 하나가 되었던 번스타인. 땀범벅이 된 채 활짝 웃으며 승리감을 느끼는 그의 연주에 박수를 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갈등을 겪었지만, 번스타인의 본질을 누구보다 가까이 느끼고 있던 펠리시아도 “당신의 마음 속에는 이제 사랑이 있다”면서 비로소 그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거장이 그렸던 사랑과 평화,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의 배경음악으로는 종종 그가 작곡한 곡이 흐릅니다. 예리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분들이라면 어딘가 아주 익숙한 곡 하나를 알아차릴 수 있으실 거예요. 바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프롤로그’인데요. 경쾌한 휘파람과 함께 뉴욕 맨해튼의 뒷골목, 웨스트 사이드를 양분하는 ‘샤크파’와 ‘제트파’의 신경전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곡이지요.
이 작품은 1957년 번스타인이 작곡을, ‘스위니 토드’ 등을 만든 전설적인 뮤지컬 제작자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사를 맡으면서 탄생했습니다. 아서 로렌츠의 극본과 뉴욕시립발레단의 예술감독이었던 제롬 로빈스의 안무까지 더해지면서 단연 브로드웨이의 화제작으로 꼽혔죠. 창작진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1950년대에 맞춰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이 때문에 원작에는 없던 인종 갈등과 화합이라는 소재가 주요하게 다뤄지는데요. 인종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미국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현안으로 꼽힙니다. 정치적으로나 사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중시해 온 번스타인이 깊이 공감하는 문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극 중에서 백인들로 이뤄진 제트파와 미국으로 이민 온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집단인 샤크파는 웨스트 사이드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입니다. 그러던 중 샤크파의 리더 ‘베르나르도’의 여동생 ‘마리아’와 제트파의 옛 두목 ‘토니’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요. ‘투나잇(Tonight)’ ‘마리아(Maria)’ 등 아름다운 선율로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하는 연인이지만, 이미 앙숙이 되어버린 두 집단 사이에서 사랑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토니와 마리아의 듀엣 곡인 ‘투나잇’을 변주한 오중창 ‘투나잇 퀸텟(Quintet)’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처럼 화음이 섞여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맘보’와 같은 라틴 음악도 눈에 띕니다. 토니와 마리아의 첫 만남 전 샤크파와 제트파의 무도회 장면을 담아낸 이 곡을 듣다 보면 다함께 “맘보”를 외치고 싶어지는데요. 클래식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도 서정성과 대중성을 담아 불후의 명곡을 작곡했던 번스타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죠.
흥행에 성공한 뮤지컬은 1961년 영화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미국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쓴 히트작이 되었습니다. 2021년에는 또 다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리메이크 작품을 발표하면서 관심을 모았습니다. 한국에서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997년 초연되어 여러 번 공연으로 만들어졌죠. 지난해 연말에는 마지막 공연 후 15년 만에 사연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으로 처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면서 프롤로그 장면에서 느꼈던 놀라움이 생생합니다. 소위 ‘일진’들이 발레 같은 우아한 몸짓으로 영역을 과시하는 괴리감이 강렬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어쩐지 순수함이 물씬 풍겼기 때문일까요. 70년 전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요즘 시대와는 맞지 않는 고루한 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여전히 내면의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번스타인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비추는데요. 복잡한 내면을 간직해 온 거장의 음악을 통해 그가 매 순간 고민해 온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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