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고물가로 고객들의 어려움이 누적된 만큼 고통 분담을 위한 상생과 소통에 대해 고민하겠습니다.”
이달 1일 은행연합회장에 취임한 조용병(사진) 회장은 취임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대내외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금융 산업이 ‘고객·사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동행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조 회장이 선임의 기쁨보다 자성의 목소리를 먼저 낸 것은 올해 은행업권이 느끼는 부담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국민이 이자 폭탄에 고통을 겪는데 손쉬운 이자 장사로 막대한 이익을 내고 돈 잔치를 벌인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대통령이 “소상공인·자영업자가 죽도록 일해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은행의 종 노릇’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은행들의 설 자리는 더욱 더 좁아졌다.
일각에서는 국내 은행의 대표 또는 대변인으로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있다. 하지만 국내 ‘리딩 금융’인 신한금융그룹을 이끌면서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특히 강조해왔던 조 회장에게 ‘상생 금융’은 오랜 시간 깊이 고민해온 과제 중 하나였던 만큼 즉흥적이거나 비판을 의식한 발언은 아니라는 평가다.
실제로 조 회장이 신한금융그룹 회장으로 있었던 지난해 9월 신한금융은 ‘신한 동행(同行, 同幸)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신한 동행 프로젝트’는 소상공인·중소기업 재기 지원, 서민 주거 및 생활 안정 지원, 창업·일자리 및 청년 도약 지원, 사회적 책임 수행 등 4개 영역에서 12개 핵심 과제를 선정해 5년간 33조 3000억 원의 직간접 금융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특히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그룹의 전략 과제로 이행 성과를 반영하고 그룹 경영 회의를 통해 진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신한 동행 프로젝트’는 금융을 활용해 장기적인 상생 생태계를 조성하는 종합적인 전략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활동과 차별화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 회장이 “은행은 경제 생태계의 일원으로 구성원 모두와 협업·공생하고 효율적인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촉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상생 금융 외에 은행권 신사업 진출이라는 과제도 해결해야 한다. 은행권에서는 신사업 진출을 위해 금산분리 제도, 투자 일임업 허용 등 관련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관련 규제 개선이 더딘 상황이다. 또 현재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한해 제한적으로 투자 일임업을 할 수 있어 수수료 이익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된다. 국내 은행들이 ‘이자 장사’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달라는 것이 은행권의 요구다. 조 회장 역시 이런 과제를 이미 알고 있다. 조 회장은 “오랜 노력에도 은행은 여전히 전통적인 사업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은행의 플랫폼 경쟁력 또한 경쟁 테크 기업에 비해 여전히 아쉬운 수준”이라며 수익 구조 다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K금융의 디지털 전환’도 새 은행연합회장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역시 이미 신한금융그룹에서 최고디지털책임자(CDO) 자리를 새로 만들어 디지털 전환(DT) 전략을 만들고 신한금융그룹의 ‘슈퍼앱’ 개발을 이끌었던 조 회장에게는 낯설지 않다. 그는 전통 은행보다 디지털 전환이 훌쩍 앞서 있는 빅테크·핀테크를 끌어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경쟁과 협력을 통해 은행들의 혁신을 이끌어내겠다는 입장이다. 조 회장은 “금융과 비금융을 아우르는 플랫폼 혁신을 통해 테크 기업들과 경쟁·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한금융그룹 회장 시절 그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2018년 이후 매년 최대 실적을 경신해 2021년에는 지주 설립 이후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계열사 인수합병(M&A)으로 사업포트폴리오 다각화에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인수 계약을 맺은 BNP파리바카디프손해보험의 사명을 ‘신한EZ손해보험’으로 변경하고 그룹의 16번째 자회사로 맞이하면서 사업구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한금융이 국내 리딩 금융으로 자리를 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실적이 좋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사업구조가 가장 탄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초 유력 후보가 아니었던 조 회장이 은행연합회장으로 ‘깜짝’ 선임된 것도 이 같은 이력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은행연합회장 후보로 전직 관료 혹은 지주 회장, 행장 출신이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5파전 양상을 띤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도 조 회장의 이름은 안 보였다. 그러다 회추위 결성 막바지에 조 회장이 등장했고 결국 만장일치로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업권 내부 평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은행업권을 조율하고 대변하는 일은 분명 거대 금융기업을 이끌었던 조 회장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잘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날 선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는 “사실 국내 최대 금융그룹 수장으로서 모든 것을 다 이뤘던 만큼 은행연합회장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하지는 않았다”며 “그럼에도 그간 본인이 보여준 성과를 고려한다면 현재 국내 은행들이 마주한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