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정점을 찍고 내려가고 있다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론’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경제지인 머니1은 최근 ‘한국은 끝났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경제가 내리막길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지난해 2.61%에서 올해 1%대로 추락한 데다 앞으로도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이 ‘피크 차이나’를 거론하며 중국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경고한 셈이다.
‘피크 차이나론’은 지난해 출간된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부터 시작됐다. 공저자인 마이클 베클리 터프츠대 교수와 할 브랜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2022년 인구가 정점에 달한 중국의 경제도 내리막길로 접어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염재호 태재대 총장 겸 SK 이사회 의장은 “우리보다 디지털 후진국이고 반도체·배터리 경쟁력에서 뒤처진 일본에서 ‘피크 코리아’가 제기되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한국 경제의 활력이 현저히 떨어진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970년대 14.9%, 1980년대 8.88%, 1990년대 7.30%, 2000년대 4.92%, 2010년대 3.33%, 2020년대 1.90%로 급락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전망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4%로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1.8~2%)보다도 더 낮다. 국내외 기관들이 내년 한국의 성장률이 2.0~2.3%가량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으나 올해 1%대 성장률의 기저 효과를 감안하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최근 한국은행은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2020년대 2.1%에서 2030년대 0.6%, 2040년대에는 -0.1%로 뒷걸음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말 골드만삭스는 저출산 영향 등으로 한국은 실질 GDP 측면에서도 2050년 나이지리아(16위), 파키스탄(17위)보다 뒤처진 20위로 급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자본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달성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의 경우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현재의 생산성 수준이라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올해 1.9%에서 2050년에는 0%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제로 성장’의 늪에 빠지지 않고 재도약하기 위한 골든타임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미국 시사 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는 최근 ‘2023 가장 강력한 나라’ 순위에서 한국을 군사력, 경제 안보, 혁신 능력 등을 감안해 2년 연속 6위로 평가했다. K팝·드라마·영화·푸드 등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긍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보릿고개’ 시절을 딛고 산업화·민주화·세계화·정보화를 달성하며 2018년·2020년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까지 오른 저력을 갖고 있다.
경제가 고도화되면 대체로 성장률은 떨어진다. 다만 성장률 하락세가 심상치 않다는 점에서 시급히 경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갈수록 노동과 자본 투입이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총요소생산성을 높여 잠재성장률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올해 3분기 합계출산율이 0.7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인 데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됨에 따라 생산가능인구(15~64세) 급감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는 2020년 정점(5184만 명)을 지나 2041년에는 5000만 명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대로 가면 2100년에는 인구가 현재의 절반 이하인 2400만 명으로 급감하고 중위(中位)연령이 59세에 달하게 된다. 이는 제조업 구인난 심화, 기업의 가격경쟁력 저하, 소비 시장 침체 등을 초래한다. 따라서 여성의 경제활동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고 질 좋은 청년 일자리를 적극 창출해야 한다. 해외의 전문 인력을 중심으로 과감히 이민을 받아들이고 범용 인력에 대한 포용성을 강화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중장기적으로 평화적 남북통일에 성공한다면 노동력 등 여러 문제를 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주요 5개국(G5) 과학기술 강국 진입’ 비전을 재정립하고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육성 등을 통해 기존 산업을 고도화하는 한편 AI·반도체·배터리·첨단바이오·양자기술·우주항공 같은 첨단 전략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혁신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빠른 ‘추격자’에서 ‘선도국’으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역동적인 벤처·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긴요하다. 윤석열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을 지낸 유웅환 박사는 “내년 R&D 예산 대폭 삭감으로 인해 과학기술계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고 벤처·스타트업의 활력도 주춤해졌다”며 “과학기술 혁신은 물론 AI 등 전략 기술 발전에 드라이브를 걸어 성장 동력을 재점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첨단산업 분야의 경우 미국처럼 금지된 것만 아니라면 모두 허용하는 쪽으로 규제의 대전환을 꾀해야 한다.
기업들이 국내에 투자하기보다는 미국·유럽이나 베트남·인도·인도네시아 등으로 몰리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현지 시장을 개척하는 효과가 있지만 국내 고용·세수 창출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개인·기업·정부의 부채 증가와 국민·공무원·사학·군인연금의 고갈 우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바라보고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개혁, 경직된 노동시장에서 벗어나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동 개혁,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연금 개혁 같은 구조 개혁도 본격화해야 한다.
이 같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담대한 비전 수립과 전략 추진을 위한 정치·행정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 당리당략에 따른 극한 투쟁에서 벗어나 정치를 복원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내는 대타협의 정치도 필요하다. 부처 간 칸막이가 높은 현재의 관료 체제를 전면 쇄신하는 것도 절실한 과제다. 염 총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한적 조직 개편 및 인사 교류에 그칠 게 아니라 R&D 등 기능별로 부처 간 전면적 인사 교류를 통해 통합·상승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제안했다. 감사 등을 두려워해 복지부동하는 관료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각종 국가 과제에 대한 능동적 대처가 불가능하다. 규제 체계의 선진화나 미래 성장 동력 확보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힘들다. 권오경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정치와 행정이 산업·노동·연금·교육 등 구조 개혁을 등한시해 경제 체질을 바꿔놓지 않으면 우리는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아일랜드가 규제 혁파, 첨단산업 유치, 교육 혁명 등을 통해 모범국으로 탈바꿈한 사례를 소개했다.
정치·행정·경제·사회·과학기술·교육 등 각 분야에서 창의와 혁신으로 도전하는 ‘기업가정신’을 북돋워야 글로벌 경제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벤처기업협회장과 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시대의 마인드와 기준으로는 빛의 속도로 정보가 공유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신성장 동력을 창출해낼 수 없다”며 “각 분야 지도자들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모범을 보이고 기업가정신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청룡의 해를 맞아 ‘화룡점정(畵龍點睛·용을 그린 뒤 가장 중요한 눈동자를 찍음)’할지, ‘용문점액(龍門點額·용문에서 뛰어오르다 이마에 상처만 입음)’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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