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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커튼콜] 연말연시…‘호두까기인형’의 달콤한 추억!






비싼 돈을 내고 공연장에 갔는데 앞 사람 키가 너무 커 두 시간 넘게 고개만 기웃거리다 온 적 있나요? 배우의 노래와 연기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여운이 남아 같은 돈을 내고 본 공연을 또 본 적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혼자만 간직하느라 답답한 적은 없나요? 세상의 모든 공연 덕후의 마음을 대신 전하기 위해 기자가 나섰습니다. 무대 위 출연진에게 박수가 쏟아지는 그 어떤 곳이라도, ‘어쩌다 커튼콜’과 함께하세요.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밤.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가족들이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주인공 ‘클라라(마리)’의 대부 ‘드로셀마이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두까기인형을 보낸다. 커다란 모자와 우스꽝스러운 콧수염, 튀어나온 이빨이 익살스럽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호두까기인형. 오빠 프리츠가 인형을 망가뜨리자 슬픔에 젖은 클라라는 잠이 들고, 꿈 속에서 다시 호두까기인형을 조우한다. 이번에는 멋진 왕자의 모습으로. (발레 '호두까기인형' 줄거리 중)

유니버설발레단 발레 '호두까기 인형' 공연 사진. 사진 제공=유니버설발레단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토요일입니다. 마침 눈도 펑펑 내리면서 연말의 기분을 돋우고 있네요. 이렇게 한 해가 마무리될 때에는 무언가 멋진 일을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첫날 정동진에서 해돋이를 보는 것도,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힘을 보태는 것도, 새해에는 꼭 읽어야 하는 책 목록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연말연시는 다짐과 설렘의 계절이니까요.

공연을 사랑하시는 여러분이라면, 연말연시가 또 다른 대목일 테지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도 그렇습니다. 베토벤 최후의 교향곡인 이 곡을 연말마다 수많은 악단이 연주할 때면 벅찬 감동이 느껴집니다. ‘합창’만큼이나 대표적인 공연도 있죠. 발레 ‘호두까기인형’이 바로 그것인데요.

절망 속 차이콥스키, 눈송이·설탕·꽃의 세계를 빚어내다


작곡가 표토르 차이콥스키. 사진=위키피디아


“따라다라다라 따라 따라닷다~” 각종 광고와 영화, 드라마에 흘러나오는 이 멜로디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글자로는 환상적인 선율을 전달할 수 없지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를 이끈 작곡가 표토르 차이콥스키의 ‘꽃의 왈츠’ 중 일부입니다😄 ‘꽃의 왈츠’는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발레 음악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중 하나이고요. 처음에는 잔잔히 시작하는 목관 악기의 도입부 이후 하프의 카덴차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점이 인상적인 곡인데요. 이외에도 ‘호두까기인형’은 ‘눈송이 왈츠’ ‘설탕 요정의 춤’ ‘아라비아의 춤’ 등 곡의 이름마저도 아기자기한 곡들을 포함하고 있죠.

‘호두까기인형’은 차이콥스키 외에도 당시 창작진 ‘올스타’들이 출동해 머리를 맞대어 만든 작품입니다. E.T.A 호프만의 동화를 원작으로, 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장이던 이반 브세볼로즈스키가 환상적인 발레에 대한 아이디어를 꺼내든 것인데요. ‘춘희’를 지은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각색한 이야기에 더해 황실극장 수석 무용수이던 마리우스 프티파가 대본을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처음부터 ‘호두까기인형’ 작곡에 열성적이지는 않았다고 해요. 든든한 후원자이던 폰 메크 부인이 갑작스럽게 후원을 중단했고, 그가 동성애자라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었거든요. 당시 시대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치부했죠. 일련의 일들로 어려움을 겪던 그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작품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의기소침한 작곡가에게로 또 하나의 비보가 날아옵니다. 여동생 사샤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었는데요.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차이콥스키는 미국 연주 여행 중 악상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되죠. 혹독한 시련이 그에게 동심의 세계를 선사하는 열쇠가 된 셈입니다. 여동생 사샤를 ‘호두까기인형’의 설탕 요정으로, 조카인 타티아나는 주인공 ‘클라라(혹은 마리)’로, 자신은 마리에게 호두까기인형을 선물하는 드로셀마이어에 대입해 작품을 완성합니다.

유니버설발레단 발레 '호두까기 인형' 공연 사진. 사진 제공=유니버설발레단


우연히 차이콥스키가 프랑스에서 발견한 악기 ‘첼레스타’도 작곡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첼레스타는 1886년 악기 제작자 뮤스텔이 발명한 악기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여행 도중 파리에서 뮤스텔의 상점에 들른 차이콥스키는 단번에 청아한 첼레스타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첼레스타는 피아노처럼 건반을 가지고 있는 악기입니다. 다만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쇠로 된 울림판을 때려 청아한 소리가 나죠. 이로 인해 실로폰 같은 유율 타악기로 분류됩니다. 예쁜 소리를 내는 첼레스타가 어린 시절 사샤와 표토르의 추억을 일깨운 것일까요. 2막에서 사랑을 확인한 마리와 왕자에게 펼쳐지는 ‘설탕 요정의 춤’은 첼레스타의 연주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마리의 모험을 축복하듯이.

1892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 무대를 올린 ‘호두까기인형’은 예상치 못한 실패를 겪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호두까기인형’은 아주 잘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되었지만 대중은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지루해 했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죠. 이후 안무의 수정을 거쳐 194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초연이 성공하면서 대중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한국에도 ‘호두까기’의 법칙은 이어진다…어떤 게 다를까?


국립발레단 발레 '호두까기인형'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발레 '호두까기 인형' 공연 사진. 사진 제공=유니버설발레단


한국에서도 ‘호두까기인형’은 대표적인 연말연시 레퍼토리 공연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74년 국립발레단이 프티파 버전의 ‘호두까기인형’을 처음 선보인 이래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매년 공연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죠. 비슷하지만 다른 두 발레단의 공연을 기자가 직접 관람했습니다.

두 발레단은 다른 버전의 안무를 사용합니다. 무대나 줄거리도 차이를 두고 있고요. 유니버설발레단은 마린스키 발레단의 안무가 바이노넨 버전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전신은 황실극장인 만큼 전통적인 화려함에 기반을 두죠. 반면 국립발레단은 볼쇼이 발레단을 이끈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안무를 채택했습니다. 볼쇼이 발레단의 특징은 극적인 안무와 민족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텐데요. 이 때문에 바이노넨 버전은 조금 더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다면, 그리고로비치 버전은 조금 더 힘차고 웅장한 느낌이 듭니다. 마임의 비중도 다릅니다. 한번도 ‘호두까기인형’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임을 자주 활용하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무대 위 무용수들이 선보이는 몸의 역동성을 관람하고 싶다면 국립발레단의 공연을 추천합니다.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발레단


안무의 디테일뿐 아니라 설정도 다른 부분이 많아요. 국립발레단 공연에서는 1막의 호두까기인형을 어린 무용수가 직접 연기하는 데 비해, 유니버설발레단 공연에서는 인형이 연기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내내 그랑 플리에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무용수를 보면 박수가 절로 나오는데요. 실제로 기자가 본 국립발레단의 공연 커튼콜에서도 호두까기인형을 맡은 이소현 양을 향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애드리브 춤을 추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생쥐들과 생쥐 왕. 사진=유니버설발레단 인스타그램 캡처


호두까기인형과 대립하는 감초 ‘생쥐왕’의 분장도 눈에 띕니다. 국립발레단은 생쥐 분장을 한 무용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유니버설발레단은 정말로 생쥐의 탈을 뒤집어 쓰거든요. 쥐의 분장은 이상하게 귀여운 느낌을 주기까지 하죠. 유니버설발레단의 생쥐들은 매 공연 다양한 애드리브 춤을 추며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전합니다.

이밖에도 주인공의 이름(국립발레단은 ‘마리’, 유니버설발레단은 ‘클라라’)이나 인형들이 추는 춤 등 여러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컨대 유니버설발레단의 ‘아라비아 인형의 춤’에서는 여성 무용수들이 군무를 추는 데 비해, 국립발레단은 남녀 무용수가 쌍무를 선보이죠. 마찬가지로 국립발레단의 ‘갈대 피리의 춤’에서는 프랑스 인형이 쌍무를 추는 데 비해, 유니버설발레단은 양치기 소녀가 나와 양을 치고요. 하이라이트인 꽃의 왈츠에서도 국립발레단은 남자 무용수들이 꽃을 상징하는 전등을 가지고 나온 데 비해, 유니버설발레단은 오직 화려한 몸짓으로 무대를 채웠죠. 흰 옷(국립발레단), 분홍색 옷(유니버설발레단)을 입고 꽃잎이 만개하듯 어우러지는 무용수들의 조화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꼭 들어맞았답니다.

무엇보다 어른이 된 주인공이 다시 현실로 돌아갈 때 결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달콤한 꿈이 끝나고 유니버설발레단의 ‘클라라’는 경쾌하게 눈을 뜨죠. 현실에는 여전히 클라라를 사랑하는 가족이 남아 있으니 동화도 아름답게 마무리되겠죠. 국립발레단의 피날레는 어른이 된 ‘마리’와 헤어지는 왕자를 무대의 구석에서 조명합니다. 왕자는 사라지는 마리에게 손을 내밀지만, 이들을 비춰주던 꽃은 하나둘씩 빛을 잃어요. 이들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마리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남아 있습니다. 올해가 가면 새로운 내년이 오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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