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세단 차량 한 대가 뻥 뚫린 도로 위를 달린다. ‘뜨등~띠리리리' 신호음과 함께 화면 아래 자막의 볼륨 칸은 꽉 채워지는데 아무런 소리가 나질 않는다. 8초 정도가 흘렀을까. 차량이 막 지나간 도로 옆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울고, 남자 성우의 나래이션으로 15초 분량의 광고는 막을 내린다. “소리없이 강하다. 쉿! 레간자~”
레간자는 한국GM의 전신이었던 대우자동차가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생산했던 중형세단이다. 당시 ‘소리 없이 강하다’는 광고 캐체 프레이즈가 인기를 끌면서 ‘소리 없이 강한 사람’을 레간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TV CF 광고에 예민한 초등학생들(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사이에선 자신의 방귀를 레간자에 비유하는 농담이 유행을 탔다.
이 차는 출고와 동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90년대 후반 현대차(005380)의 쏘나타3와 기아(000270)차의 크레도스가 양분하던 중형차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중·고속 주행에서도 타 브랜드를 압도하는 정숙성을 차량의 세일즈 포인트로 정하다보니 기술진들이 정숙성을 높이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각종 차음재를 대거 적용하다보니 차체 크기에 비해 중량(1325kg)이 무거워져 연비가 떨어지는 역효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레간자는 올해로 단종된지 21년이 됐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가 집계한 11월 기준 제작사·차명 등록현황에 따르면 레간자는 2290대가 도로룰 달리고 있다. 국내 전체 차량 등록대수(2591만7976대)와 비교하면 0.01%도 안되는 미미한 비중이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수다.
국민 경차 ‘티코’도 마찬가지다. 티코는 1980년대 후반 정부가 진행한 ‘국민차 사업’의 사업자로 선정된 대우조선이 1991년부터 창원시 대우국민차 공장(현 한국GM 창원공장)에서 생산한 우리나라 최초의 경차다. 일본 스즈키와 협력해 알토3세대 모델을 그대로 들여왔다. 티코는 1998년 한석규·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차단속원이었던 심은하의 차량으로 등장했고, 극중에 나온 티코는 영화 촬영 장소인 군산시 소재 초원사진관에 전시돼 있다. 아기공룡 둘리 극장판에선 고길동의 차로 나온다.
2001년 단종된 티코는 마티즈·모닝 등 경쟁력 있는 경차들이 속속 출시되며 이제는 ‘추억의 차’가 됐지만 행정상으로는 63대가 생존해있다. 옛 대우조선 시절 만든 티코는 1만1707대가 등록돼 있다.
최근 현대자동차의 헤리티지 프로그램을 계기로 유명세를 탄 포니도 6000대 넘게 살아 있다.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생산 모델로 탄생한 포니는 1990년 포니2가 최종 단종되기 전까지 세단과 픽업, 왜건, 3도어 등 다양한 모델이 출시되며 1970~1980년대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았다. 올 11월 기준 포니는 6046대가, 포니 픽업은 1830대가 등록돼 있다. 포니1 시리즈의 경우 1982년에 생산을 멈췄으니 무려 42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는 셈이다.
‘기아판 포니’로 불리는 브리사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73년 첫 출시돼 1981년 단종된 브리사는 현대차 포니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 최고 인기모델이었다. 지금이야 기아가 현대차와 한 지붕 아래 있지만 당시엔 강력한 경쟁상대였다. 브리사는 일본 마쓰다 패밀리아를 기반으로 한 차량이엇지만 부품 국산화율이 90%에 달했다.
1980년대 자동차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기아차의 승용차 생산이 금지되면서 브리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비운의 차’가 됐다. 요즘 시대엔 광주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송강호의 택시로 유명세를 탔고, 최근 기아의 헤리티지 프로그램 차량으로 선정돼 현실세계로 소환됐다. 브리사는 현재 555대가 등록돼 있다. 1977년 12월부터 1982년까지 새한자동차가 생산한 제미니도 234대가 생존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쿠페형 차량인 현대차 스쿠프(1996년 단종)도 3261대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현대차 포니의 소형차 계보를 잇는 엑셀(1994년 단종)은 여전히 많은 1만7140대가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쏘나타가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 중형 세단의 대표주자로 활동했던 스텔라(1997년 단종)도 6029대가 남아 있다. 1983년 첫 선을 보인 스텔라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전용차로도 쓰였던 장수 모델이다. 차체 디자인은 포니를 디자인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이밖에도 기아의 세피아(8601대)·콩코드(7280대)·크레도스(5182대), 옛 대우차의 르망(1만5949대)·에스페로(9290대)·누비라(3270대) 등 추억의 차량들이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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