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정부가 올해부터 1000억 유로(약 144조 원) 규모의 ‘미래 기금(Future Fund)’을 조성한다.
미래 기금의 핵심은 2035년까지 매년 아일랜드 국내총생산(GDP)의 0.8%에 달하는 돈을 기금에 투입하는 것이다. 아일랜드 재무부는 연평균 투자 수익률을 약 4%로 가정하면 기금 규모가 1000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더블린에서 만난 율리아 지드슐락 아일랜드 경제사회연구소(ESRI) 연구교수는 미래 기금을 우천 기금(Rainy day Fund)에 빗댔다. 최근 경기 호황에도 아일랜드 정부가 향후 경제가 나빠지는 이른바 ‘경제적 우천’에 준비하는 차원의 기금이라는 것이다. 지드슐락 교수는 “최근 특정 산업군에서 유독 많은 법인세가 걷혔다”며 “(아일랜드) 정부가 이 같은 구조의 세수 호황은 지속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해 경기 침체에 대비한 기금을 미리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핏 보면 아일랜드의 우려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당장 지난해 법인 세수만 해도 220억 유로(11월 누적 기준)로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도 전년 대비 4.2% 늘었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글로벌 경기 침체가 닥쳤던 2020~2022년에도 아일랜드의 GDP는 연평균 10.4%(IMF 기준)씩 성장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GDP 성장률이 2022년 기준 3%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보적인 성장세로 볼 수 있다. 경기 호황에 힘입어 지난해 재정 흑자는 100억 유로(약 14조 4000억 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지난해 세수 결손 규모가 59조 1000억 원으로 예상된 것과는 확연히 대조된다.
그럼에도 아일랜드가 미래 기금을 조성하는 것은 외국 자본 의존도가 높다는 점 때문이다. 최근 세수 호황 역시 아일랜드에 둥지를 툰 외국계 기업의 영향이 크다.
아일랜드에서 매년 소득세 다음으로 많이 걷히는 법인세만 놓고 봐도 글로벌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확인할 수 있다. ESRI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아일랜드 법인세의 86.5%는 외국계 기업에서 걷혔다. 또 같은 해 법인세의 약 55%는 구글 등 매출액 기준 상위 10대 기업이 냈는데 이들 기업 역시 모두 외국계였다. 다국적 기업의 실적에 따른 세수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아일랜드 법인세는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3개월 연속 감소하다가 11월에야 반등했다. 아일랜드에 유럽 본부를 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과 제약사의 매출 변동에 따라 세수도 요동친 것이다. 마이클 맥그라스 아일랜드 재무부 장관은 “지난해 법인세 수입은 1년 전보다 4%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실적 과잉의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짚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아일랜드가 ‘우천’을 대비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러시아발(發) 가스 공급 중단 사태로 유럽이 에너지 위기를 겪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자 아일랜드가 자국 내 외국 자본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북미유럽팀 부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자국 내 외국 자본을 경제적 논리만이 아닌 지정학적 논리로 보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아일랜드도 현 경제 구조의 지속 가능성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도 적지 않다. 한국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를 필두로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액을 늘리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이에 지난해 FDI 신고액은 전년 대비 7.5% 증가한 327억 2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장 위원은 “아일랜드의 FDI 유치 전략 중 하나는 외국 기업이 수도 등 특정 지역에 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한국도 지방 소멸 위기가 커지고 있는 만큼 낙후 지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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