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극자외선(EUV) 반도체 규제 속에서 우시 공장의 공정 전환을 추진한다. D램 시장 회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정 전환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연내 중국 우시 공장의 일부인 ‘C2’ 팹을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초반의 4세대(1a) D램 공정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시 공장은 SK하이닉스 전체 D램의 약 40%를 만드는 회사의 핵심 생산 기지다. 현재 이곳에서는 구형(레거시) 제품군에 속하는 10나노급 후반의 2세대(1y), 3세대(1z) D램 등을 제조하고 있다.
그동안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을 10㎚급 4세대 D램 이상의 공정으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의 대중(對中) EUV 규제 때문이다. 미국은 2019년부터 중국 땅에 첨단 반도체 공정을 위한 필수 장비인 ASML의 EUV 노광기 반입을 불허했다.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 움직임을 압박하려는 목적이다.
SK하이닉스는 이 규제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회사는 10㎚급 4세대 D램 생산부터 EUV 공정을 적용했는데 우시에는 EUV 노광기를 반입할 수 없어 규제 범위 내에서 이 D램을 생산해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물론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미국 정부의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정으로 중국 공장에도 18㎚ 이하 D램 제조용 장비를 들여올 수 있게 됐다. 다만 이러한 조치에서도 EUV 장비 반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SK하이닉스가 공정 전환을 결정하면서 선택한 방법은 ‘운송’이다. 우시 라인에서 4세대 D램 공정의 일부를 진행하고 이 웨이퍼를 본사가 있는 이천캠퍼스로 가져와 EUV를 적용한 뒤 다시 우시로 보내 공정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4세대 제품에는 1개 D램 층에만 EUV 공정을 적용하기 때문에 비용 증가를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또 회사는 2013년 우시 공장 화재 당시 이 같은 방법으로 D램 생산 차질 문제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SK하이닉스 측은 우시 공장의 공정 전환과 관련해 “회사의 구체적인 공장 운영 계획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13년 중국 우시에 있는 SK하이닉스 D램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자 SK는 하늘길을 활용하는 묘수를 발휘했다. 일부 라인 전소로 당장 진행할 수 없는 공정이 생기자 생산 중인 웨이퍼를 비행기에 싣고 이천 공장으로 가져와 필요한 작업을 한 뒤 다시 중국으로 옮겨서 마무리한 것이다. 당시 화재로 우시 공장 생산 능력은 기존의 절반가량인 월 6만 5000장 수준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비행기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D램 공급 리스크를 최소화했고 신속한 복구를 통해 두 달 보름 만에 정상화에 성공했다. 화재 위기가 6개월에서 1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업계 예상을 뒤엎고 사상 초유의 D램 수급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SK하이닉스가 10년 전의 대책을 다시 꺼낸다. 중국에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반입할 수 없다는 미국의 제재를 준수하기 위해, 우시 공장의 웨이퍼를 우리나라 이천 사업장으로 옮겨 10㎚급 초반의 4세대(1a) D램을 만드는 식이다. 반도체 시장이 회복세에 접어들면서 고성능 칩 생산량 확대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계산도 깔렸다.
SK하이닉스는 시장 1위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사수하려면 10㎚급 4세대 D램 이상의 하이엔드 제품이 필요하다. SK하이닉스가 현재까지 생산하고 있는 4세대 HBM(HBM3) 제품의 최대 용량은 24GB다. 16Gb짜리 10나노급 후반의 3세대(1z) D램 제품을 12단으로 쌓아 올렸을 때 나올 수 있는 용량이다.
SK하이닉스가 올 상반기부터 양산해야 하는 신제품 5세대 HBM(HBM3E)의 개당 최대 용량은 36GB(288Gb)다. 24Gb D램을 12개 쌓아 올려 구현한 칩이다. SK하이닉스는 2021년 4세대 D램 공정으로 24Gb D램을 처음으로 구현했다. HBM3E는 4세대 D램 이상으로 만들어야 고객사의 요구 사항을 충족할 수 있다.
우시 공장은 현재 HBM3에 활용됐던 3세대 D램 위주로 생산한다. SK하이닉스에 러브콜을 보낸 엔비디아 등 핵심 고객사의 늘어나는 HBM3E 주문 물량에 대응하려면 본사인 이천 공장 외에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우시 D램 공정을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HBM 외에 범용 D램 시장이 전반적으로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는 점도 중국 공장의 업그레이드를 단행해야 하는 이유다. 시장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DR4 범용 D램 가격은 지난해 9월 바닥을 찍은 뒤 3개월 연속 반등세를 보였다. 또 세계 D램 시장은 지난해 3분기부터 수요량이 공급량을 약 11.07% 웃도는 등 공급 부족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물론 D램 시장 1위 삼성전자, 3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적극적인 감산에 따라 시장이 균형을 찾아간 모습이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 일부를 10㎚급 4세대 D램 라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전략과 함께 감산으로 인해 2022년 4분기 대비 약 20% 떨어진 D램 공장 가동률을 다시금 회복하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또 우시 공장 전환과 함께 주력 생산 기지인 이천 캠퍼스에서 M14·16을 중심으로 월 4만 2000장 규모의 최첨단 10㎚급 5세대 D램 라인 공정 전환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측은 지난해 10월 열린 2023년도 3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2024년에는 생산 능력 증설보다 공정 전환에 집중하고 설비투자 효율성에 기반해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024년 말까지 D램 4세대와 5세대 생산 비중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우시 공장 리스크는 완벽하게 걷히지 않았다. 4세대 D램에는 칩을 구성하는 수 십여 개 레이어 중 1개 층에만 EUV 공정을 활용한다. 운송 수단을 활용해 우시와 이천을 왕복하더라도 이윤을 낼 수 있다는 경영진의 계산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다음 세대인 5세대 D램부터다. 이 D램에는 5개 층에 EUV 공정을 활용한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도 높은 비용 구조와 생산 효율성 저하를 극복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미국의 대중 EUV 제재가 완화되지 않는 한 우시 공장의 5세대 D램 전환에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SK하이닉스 고위 경영진은 공식 석상에서 미국 정부의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고 있는 CES 2024 전시회에 참가해 “지정학적 부분에 대해 지난해부터 사내에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며 “이를 통해 사업 리스크가 상당 부분 완화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