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위안화가 북한 원화보다 북한 시장(장마당) 내에서 더 많이 유통된다는 탈북민 대상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집권 이전과 비교하면 장마당 내 위안화 통용 비중이 5배 가까이 급증하는 등 북한 경제의 중국 예속화가 빨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난 속 김 위원장의 권력 승계와 백두 혈통 세습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50%를 넘어서는 등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통일부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 보고서’를 발표했다. 통일부가 전문 연구자와 리서치 기관을 통해 탈북민 6300여 명을 10년간 1대1로 설문 조사한 결과다. 그동안 3급비밀로 분류해오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집권한 2012년 이후 북한 장마당 내에서 거래되는 화폐 비중은 중국 위안화가 57.9%로 가장 많았다. 2011년 이전의 12.2%에서 큰 폭으로 늘어난 것으로 북한 원화(36.4%)보다 많은 양의 위안화가 북한 장마당 내에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보고서는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에 이어 2010년대 들어 대중국 무역이 활성화하면서 중국 제품의 판매가 늘어났고 위안화 사용도 덩달아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5년 단위로 쪼개 보면 북한 내 외화 통용 현상은 더 두드러진다. 2000년 이전에는 장마당에서 유통되는 화폐 중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6.4%, 북한 원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81.6%였으나 2011~2015년에는 위안화가 50.2%, 북한 원화가 44.2%로 위안화의 비중이 북한 원화를 넘어섰다. 2016~2020년에는 위안화 68.4%, 북한 원화 25.7%로 격차가 더 확대됐다.
여기에 2010년대 들어서는 미국 달러화의 통용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2010년 이전에는 응답자의 1% 이하가 시장 거래의 주요 화폐로 달러화를 선택했지만 2011~2015년에는 2.6%, 2016~2020년에는 5.2%로 불어났다. 특히 최고위층이 모인 평양에서는 달러화 통용 비중이 32.7%에 달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접경지는 밀수로 인해 위안화를 사용하고 평양은 기본적으로 뇌물을 달러로 받아 외화 통용이 확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정권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부정적인 평가 역시 커지는 추세다. 2016~2020년 사이에 북한에서 탈출한 주민 중 북한 거주 당시 ‘백두 혈통 영도 체계가 유지돼야 한다’고 인식한 비율은 29.4%에 그쳤다. 2000년 이전에 탈북한 이들의 해당 답변이 57.3%였던 것과 비교하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탈북 전 백두 혈통 영도 체계 유지에 반대하는 인식을 가졌다’는 응답도 탈북 시기에 따라 2000년 이전에는 22.7%였지만 2016~2020년에는 53.9%로 확대됐다. 북한에 거주할 때 김정은의 권력 승계가 정당하지 않다고 여겼다는 답변 역시 탈북 시기에 따라 2011~2015년 47.9%에서 2016~2020년 56.3%로 증가했다. 통일부는 탈북민의 불만 정도가 북한 전체 여론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세습의 정당성에 불만을 가진 주민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했다.
한편 1990년대 중반 심각한 경제난 이후 북한의 배급 시스템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이후 탈북민 중 식량 배급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비율은 26.8%, 받지 못했다는 72.2%였다. 여기에 식량 배급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 중에서도 주기적으로 배급을 받았다는 비율은 39.4%에 그쳤다.
의식주와 전력 등 인프라의 만성적인 부족 또한 심각했다. 하루 평균 가정용 전력 공급 시간은 4.3시간으로 집계됐고 난방 역시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구해와 해결하고 있는 비율이 69.7%로 나타났다. 보건 체계도 사실상 붕괴됐다. 병원 진료 경험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39.6%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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