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 손실에 대해 금융회사들이 선제적 자율 배상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압박하고 있지만 은행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당국의 기준안 없이 은행이 먼저 배상 카드를 꺼내면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인 주주들로부터 배임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따라 은행권은 법무법인들과 사례별로 법적 분쟁 가능성을 검토하며 앞으로 불거질 수 있는 법적 다툼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홍콩H지수 연계 ELS 관련 배상안에 대한 검토에 돌입했지만 내부적으로 선제적인 배상안 마련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 당국의 검사 결과나 제재 수위가 결정되기 전에 은행들이 먼저 자체 배상안을 내놓을 경우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불완전판매 혐의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비자들과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 여부를 법적 소송으로 다툴 때 은행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은행들의 판단이다. 은행들은 이 외에도 추후 거액의 과징금을 내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분쟁 조정, 징계 등에서도 불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법률적 리스크 때문에 한 시중은행은 지난해 4분기 실적에 ELS 손실 관련 충당금을 선제적으로 쌓는 방안을 검토하다가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체 배상안을 마련해 손실 보전에 나설 경우 배임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일괄적 비율로 선지급한 비용이 이후 과지급으로 판단된다고 해도 돌려받을 길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특히 ELS는 과거 라임이나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때와는 달리 투자 계좌 수만 20만 개가 넘어가는 범용 상품이기 때문에 배상 규모 부담이 적지 않다. 게다가 사례도 다양해 일괄적인 배상 지급이 어렵다는 게 은행들의 논리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배상 방식에 따라 은행 수익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배임 이슈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법무법인과 함께 사례별로 검토하며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 금융 분쟁 배상 절차는 금감원 검사가 완료된 후 불완전판매 혐의를 입증하고 이후 제재를 통보받아 배상 기준안을 마련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 절차를 거친 뒤 금융사와 소비자 간 분쟁 조정 합의 등이 이뤄지는 식이다. 분쟁 조정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금융사와 소비자가 민사소송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은행들은 이 같은 통상적 절차에 따라 대응할 방침이다. 금감원이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에 내놓을 예정인 배상 기준안을 지켜본 뒤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이달 16일 2차 현장 검사에 돌입해 이달 말께 조사를 끝낼 예정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2019년 해외 DLF 사태 당시의 배상 기준안이 기본 토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불완전판매 유형을 분류하고 나이·재산 상황 등을 따져 배상 수준을 달리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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